Ep. 6 Getting Over It (2017)
바위를 긁는 망치의 날카로운 소리, 한순간의 계산 착오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때 위장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조용하고 들끓는 분노. Getting Over It을 플레이하는 경험은 이처럼 원초적인 감각의 연속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명백한 고통을 스스로에게 가하고 있을까?
이 질문의 중심에는 개발자 베넷 포디가 있다. 베넷 포디는 단순한 게임 디자이너가 아니라 컨트롤러를 든 철학자이자 도발가에 가깝다. 그는 이 게임을 특정한 종류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만들었다고 공언했다. 이 발언은 게임의 잔인함이 결함이 아니라 핵심 기능임을 선언하기도 한다.
이 게임은 서사를 통해 나약함이나 고군분투를 단순히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대신, 게임의 메커니즘 자체를 무기화하여 플레이어 자신의 날것 그대로의 취약성 통제력의 부재, 좌절감,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경험의 주된 매체로 삼는다. 이 게임은 취약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우리를 그 안에 살도록 강제한다.
1. 좌절과 비명
통제력이 완전히 상실된다.
이 게임의 핵심에는 단 하나, 지독하게 기발하고 플레이어를 미치게 만드는 조작 체계가 있다. 플레이어는 커다란 솥에 갇힌 채 망치 하나에 의지해 기이한 산을 올라야 한다. 이 조작법은 의도적으로 어색하고, 예민하며, 까다롭게 설계되었다. 망치의 머리 부분만이 충돌 판정을 가지며 운동량이 핵심이 되는 물리 기반 시스템은, 숙련에 대한 플레이어의 기대를 철저히 배반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심지어 움직임은 완전히 결정론적이지 않아, 똑같은 입력값이 항상 똑같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예측 불가능성마저 내포한다.
이 메커니즘은 대부분의 비디오 게임이 제공하는 힘의 근간, 즉 플레이어의 통제력을 체계적으로 해체한다. 연습이 완벽한 실행으로 이어지는 다른 게임들과 달리, 아무리 숙달된 움직임이라도 매 순간이 완전한 파멸의 위험을 동반하는 도박이 되게 만든다. 망치를 휘두르는 도중에 카메라가 캐릭터 중심으로 재조정되어 의도치 않은 행동을 유발하는 현상이 플레이어의 의도를 배신하도록 설계된 대표적인 사례다.
레벨 디자인 자체는 이 조작법의 공범 역할을 한다. 산은 버려진 사물들로 이루어진 원뿔 형태의 구조물로, 더 높고 넓은 지점에서 추락할 경우 거의 반드시 더 낮고 이른 구간에 떨어지게 된다. 체크포인트나 안전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탓에 플레이어는 매 순간 자신의 진행 상황이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뼈저리게 인식하게 된다. 게임은 진행 상황을 저장하지만, 실수마저도 저장하여 실패를 영원한 기록의 일부로 만든다.
이러한 설계의 이면에는 인간의 의지와 실행 능력 사이의 간극에 대한 깊은 통찰이 담겨 있다. 플레이어들은 망치가 마우스의 움직임을 그대로 따르지 않고 이상한 곡선 궤적으로 움직이며, 큰 마우스 움직임이 작고 지연된 망치 움직임으로 이어진다고 체감한다. 이는 플레이어의 의지가 게임 세계에 완벽하게 반영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이건 우리가 어려운 인생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의도와 결과 사이에 느끼는 괴리감과 유사하다. 우리는 침착하고, 정확하며, 효과적으로 행동하려 하지만, 몸은 떨리고 마음은 조급해지며 행동은 서툴러진다. 결국 베넷 포디는 플레이어가 캐릭터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그리고 플레이어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상징하는 도구와 씨름하게 하는 시스템을 설계한 것이다. 조작의 좌절감은 단순히 난이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와 그것을 실행할 능력 사이의 격차를 직시하게 만드는 게임의 핵심 장치이며, 이는 취약함을 느낀다는 것의 본질 그 자체다.
2. 추락의 해부
상실감이 성취감을 낳는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몇 시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경험은 심오한 심리적 충격을 남긴다. 이 경험은 충격, 부정, 분노, 불안, 피로, 절망감 등 실제 트라우마와 유사하다. 게임의 제목 Getting Over It 그 자체는 '극복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잠재적 상실을 극대화함으로써, 게임은 아주 작은 성공의 가치를 기하급수적으로 증폭시킨다. 위태로운 발판 하나를 붙잡고, 심연 위로 성공적으로 망치를 휘두르는 모든 순간이 기념비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완전한 실패가 항상 한 번의 미끄러짐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위험-고보상 구조는 뇌를 도박과 유사한 방식으로 조종하여 긴장과 해소의 중독적인 순환을 만들어낸다.
결국 이 게임은 실패를 피하는 법이 아니라, 그것을 견뎌내는 법을 가르친다. 추락하고 다시 오르는 반복적인 순환은 플레이어에게 기계적인 기술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회복탄력성을 강제로 구축하게 한다. 게임을 끝내는 플레이어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파괴적인 추락 이후에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운 사람이다. 게임은 실패란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채로 머무는 것이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체득하게 한다.
3. 개발자의 속삭임
쓰레기 더미 위에서 진정성을 찾다.
베넷 포디의 내레이션은 게임 경험에서 분리할 수 없는 핵심적인 층위다. 포디의 역할은 복잡하고 모순적이다. 플레이어를 조롱하고 실패했을 때 좌절감을 주는 음악을 트는 등 고문관의 역할을 하다가도, 디자인 과정을 공유하고 니체 같은 사상가들을 인용하며 진심 어린 격려를 건네는 철학적 안내자가 되기도 한다.
그 사색은 현대 디지털 콘텐츠의 일회성에 대한 비평으로 이어진다. 인터넷이 거대한 디지털 매립지가 되었으며, 콘텐츠는 몇 초 만에 소비되고 폐기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창작자들은 성취감 없이 쉽게 소비되는 상냥한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포디는 묻는다. "어차피 모든 것이 다른 개성 없는 콘텐츠들과 함께 매립지로 갈 운명이라면 무엇하러 어렵고 도전적인 콘텐츠를 만들겠어요?". 게임의 대답은 그 어려움, 그 비접근성이야말로 게임에 가치와 영속성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고투의 과정이 경험을 기억에 남고 의미 있게 만들며, 잊혀진 디지털 쓰레기가 되는 것을 막는다. 플레이어의 고통은 진정성을 위한 대가인 셈이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함에 따라, 내레이션의 톤은 조롱에서 공감과 진심으로 변화한다. 게임의 마지막은 적대감이 아니라, 창작자와 플레이어 사이의 연결과 공유된 이해로 귀결된다. 게임은 궁극적으로 끝까지 도달한 그 한 사람에게 나의 모든 사랑을 담아 헌정된다.
플레이어가 오르는 쓰레기 더미 산은 포디가 내레이션에서 묘사하는 문화적 매립지의 문자 그대로의 현현이다. 게임의 배경은 가구, 바위, 장난감, 도구 등 버려진 사물들의 기이한 콜라주, 말 그대로 쓰레기 산이다. 포디는 내레이션에서 인터넷을 괴물같이 큰 쓰레기의 산이자 우리가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본 모든 것이 들어있는 매립지라고 명시적으로 언급한다.
게임 플레이는 내레이션의 핵심 은유를 직접적으로 실행하는 행위다. 플레이어는 포디가 해체하고 있는 바로 그 개념 위를 물리적으로 등반하고 있다. 이 등반 행위는 혼돈스럽고 무의미해 보이는 더미 속에서 길과 목적, 그리고 정상을 찾으려는 시도다. 이는 게임의 부조리함을 재구성한다. 이것은 단지 무의미한 과제가 아니라, 현대 창작 환경에 대한 논평이다.
예술가나 개인이 일회용 콘텐츠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떻게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게임의 대답은 순전하고 완고한 의지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포기하기를 거부함으로써, 플레이어는 무의미함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들은 정상에 도달하기 위한 반복된 시도를 통해 쓰레기 더미를 진짜 산으로 바꾼다. 등반 중에 경험하는 취약성과 고통이야말로 일회용품을 심오한 것으로 변모시키는 연금술이다.
이 게임의 제목이야말로 그 의미를 푸는 열쇠다. 최종적인 승리는 단순히 정상에 도달하는 행위가 아니다. 진정한 성취는 플레이어가 겪는 내면의 변화, 즉 자신의 한계, 분노, 절망, 그리고 포기하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극복(getting over)하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 이 게임은 우리 자신의 회복탄력성을 비추는 거울이다.
진정한 의미와 힘, 그리고 진정성은 우리의 약점을 피하거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함으로써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우리 취약성의 바로 그 심장부에서, 추락한 뒤에도 다시 오르려는 용감하고 부조리한 행위 속에서 벼려진다. 우리의 취약성이 의미를 향한 장애물이 아니라, 바로 그 의미로 향하는 길 자체임을 보여주는 오늘의 게임, Getting Over It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