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8 스탠리 패러블 (2011)
해당 글은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해 데이비 리든의 스탠리 패러블 (2011)에 대한 최소한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텅 빈 사무실, 말이 없는 주인공 스탠리, 그리고 이내 들려오는 내레이터의 목소리로 게임은 시작된다. 플레이어는 곧 게임의 첫 번째이자 가장 상징적인 선택의 순간과 마주한다. "스탠리는 두 개의 열린 문 앞에 섰을 때, 왼쪽 문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단순한 지시와 그것을 무시할 수 있는 플레이어의 능력은, 이 게임이 담고 있는 모든 철학적 갈등을 단 하나의 순간으로 압축해 보여준다.
오른쪽 문으로 가는 것이 올바른 플레이 방식일까? 왼쪽 문으로 가는 것이 잘못된 방식일까? 스탠리 패러블은 의도적으로 잘못된 길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의미 있는 플레이 방식이라고 제안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게임은 주인공 스탠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플레이어와 이야기 그 자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단조롭고 선택 없는 삶의 상징인 사무실이라는 배경은, 이러한 반항의 서사를 탐구하기 위한 완벽한 무대가 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스탠리 패러블은 잘못된 플레이라는 개념 자체를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상호작용 디자인의 걸작이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의 불복종이라는 행위를 버그나 오류가 아닌, 게임의 핵심 메커니즘이자 서사의 동력으로 변환시킨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의 주체성과 개발자의 의도 사이의 정면충돌을 유도하며, 게임이라는 매체의 본질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1. 개발자와의 대화
내레이터와 제4의 벽
게임 속 내레이터는 단순한 목소리 연기를 넘어선 존재다. 그는 자신의 각본이 충실히 이행되기를 기대하는 게임 디자이너이자 이야기의 저자를 의인화한 캐릭터다. 그의 초기 톤은 차분하고 전문적이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한 태도를 통해 창작자와 소비자 사이의 전통적인 권력 구도를 확립한다. 이는 문학 작품 속에서 독자들이 감히 도전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전지적 작가의 목소리와 유사하며, 앞으로 펼쳐질 전복을 위한 무대를 마련한다.
제4의 벽을 파괴한다는 것은 게임 세계 바깥에 있는 플레이어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인지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스탠리 패러블에서 이 행위는 가끔 등장하는 농담이 아니라, 게임의 근본적인 상호작용 방식이다. 플레이어가 지시를 따르지 않을 때, 내레이터는 스탠리가 아닌 당신, 즉 플레이어를 직접적으로 호명하기 시작한다. 이는 게임 플레이와 이야기 사이의 긴장감, 즉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를 만들어낸다. 루도내러티브 부조화란 무엇일까? 사례를 들어 말하자면, 게임에서 주인공이 친절한 영웅으로 묘사되는데 정작 게임플레이는 수많은 적을 학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그 예시다. 그런데 이는 스탠리 패러블에서 결함이 아닌 핵심 메커니즘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역학 관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악명 높은 청소 도구함 엔딩(Broom Closet Ending)이다. (다만, 팬들이 붙인 이름이지 실제 엔딩은 아니다.) 플레이어는 이야기 진행과 아무 상관없는 청소 도구에 들어가 나오기를 거부한다. 이는 명백한 비협조이자, 정해진 서사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소극적 저항이다.
이러한 플레이어의 잘못된 선택에 대한 내레이터의 반응은 혼란, 짜증, 애원, 분노를 거쳐 마침내 지친 체념에 이르는 감정의 파노라마를 보여준다. 심지어 확장판의 개념인 울트라 디럭스 버전에서는 플레이어를 밖으로 유인하기 위해 청소 도구함 스티커라는 보상을 제안하기까지 한다. 이 상호작용은 권력 관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플레이어의 단순하고 잘못된 선택은 작가로 하여금 즉흥적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도록 강요한다. 서사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던 청소 도구함이라는 공간은, 오직 플레이어가 그것이 중요하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다양한 엔딩에 걸쳐 나타나는 내레이터의 반응은 그 스스로가 복잡하고 거의 비극적이기까지 한 캐릭터임을 드러낸다. 그는 플레이어가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는 듯하면 기뻐하지만, 자신의 의도가 무시당하면 스탠리와 플레이어 모두를 경멸하게 된다. 전화 엔딩(Phone Ending)에서 나레이터는 의미 있고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내려는 필사적인 시도의 일환으로 스탠리의 아내를 흉내 내지만, 이마저도 거부당한다.
전통적인 미디어에서 작가는 도전할 수 없는 전지전능한 존재로 그려진다. 내레이터 역시 처음에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청소 도구함에 머물거나 승강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플레이어의 불복종은 전통적인 작가가 설명할 수 없는 행위다. 스탠리 패러블에서 이러한 행위들은 모두 예측되어 있지만, 그것들은 내레이터가 의도한 이야기를 파괴한다. 나레이터는 더 이상 객관적인 신이 아니라, 플레이어와 함께 게임 안에 갇힌 주관적인 캐릭터가 된다. 이러한 권력의 이동은 상호작용 매체에서 플레이어가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닌 능동적인 참여자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잘못된 플레이는 단순한 규칙 위반이 아니라, 작가와의 대화에 참여하고 그의 통제력의 한계를 드러내는 서사적 공동 저작 행위로 격상된다.
2. 자유의 환상
자유의지에 대한 코드화된 탐구
이 게임은 자유의지와 결정론이라는 철학적 논쟁을 탐구하기 위한 완벽한 축소판을 제공한다. 비디오 게임은 겉보기에는 열린 세계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닫혀있는 결정론적 시스템이다. 모든 가능한 행동, 모든 반항의 경로는 이미 창조자에 의해 미리 결정되어 있다.
스탠리 패러블은 이 역설을 정면으로 다룬다. 플레이어가 잘못된 문을 선택하면 내레이터는 좌절하지만, 이내 새로운 길과 새로운 내레이션이 펼쳐진다. 이는 플레이어의 자유의지에 따른 행동이 이미 개발자에 의해 예측되고 코드에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선택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선택의
느낌과 그 결과에 대한 탐구를 핵심적인 경험으로 만든다.
두 가지 엔딩으로 이를 분석해보자. 우선 폭발 엔딩에서는 정신 조종 장치를 켜는 선택을 함으로써, 플레이어는 선한 길을 정면으로 거부한다. 내레이터는 해결책을 찾으려는 플레이어의 필사적인 노력을 비웃으며, 이길 수 없는 카운트다운 속에 가두는 것으로 이러한 불복종을 처벌한다. 이 엔딩은 운명론에 대한 냉혹한 은유로 기능한다. 어떤 선택들은 이후의 행동과 관계없이 미리 정해진, 피할 수 없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압착기 엔딩도 있다. 이 엔딩은 게임 자체의 본질에 대한 직접적이고 비판적인 자기 성찰이다. 플레이어는 스탠리 패러블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박물관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여성 내레이터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때 두 개의 문이 가진 역설을 설명하며, 플레이어가 앞으로 나아가는 한 다른 누군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는 유일한 진정한 선택이 ESC 키를 누르고 게임을 종료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린다. 이는 게임의 결정론적 본질에 대한 가장 노골적인 선언이다.
이 게임은 결정론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결정론적 틀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경험 자체를 탐구한다. 현실의 삶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의 욕망과 신념이 이전의 원인들에 의해 형성되었을지라도 그것에 기반하여 선택을 내린다. 이 게임의 가치는 이 추상적인 철학적 문제를 만지고 플레이할 수 있는 유형의 경험으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순수한 결정론적 관점에서는 모든 선택이 미리 정해져 있기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 선택이 조작된 결과로 이어질 때조차도 진정한 긴박감, 걱정, 그리고 만족감을 느낀다고 보고한다. 압착기 엔딩에서 게임을 종료하라는 제안은 문자 그대로의 지시가 아닌 철학적 도발이다. 이 엔딩을 본 후 게임을 영원히 그만두는 플레이어는 거의 없다. 대신, 그들은 이후의 플레이를 통해 선택의 본질에 대해 더 비판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따라서 이 게임은 의미 있는 선택을 재정의한다. 그것은 시스템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스템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는 선택을 하는 것이다. 빗자루 찬장을 선택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자유를 부여해서가 아니라, 내레이터의 서사적 충동을 거부하는 의식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의미는 불복종을 통해 스스로 생성된다.
3. 규칙을 가지고 놀아라!
게임 그 자체가 된 메타픽션
이 게임은 표준적인 비디오 게임의 관습을 전복한다. 대부분의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성공하기 위한 규칙을 가르친다. 반면 스탠리 패러블은 규칙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핵심임을 가르친다. 게임의 구조가 의도적으로 재배열되어 플레이어를 혼란시키는 혼란 엔딩(Confusion Ending)이나, 원래는 버그였지만 공식적인 엔딩으로 편입된 사례 등이 게임이 자신의 구조 자체를 가지고 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따라서 이 게임의 진정한 "게임"은 사무실을 걸어 다니는 행위가 아니다. 진짜 게임은 플레이어, 캐릭터(스탠리), 그리고 창조자(내레이터) 사이의 관계를 탐색하는 지적인 행위 그 자체다. 잘못된 플레이는 이 세 주체 사이에 가장 많은 마찰과 대화를 생성하기 때문에, 이 진짜 게임에 참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된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게임을 '잘못된 방식'으로 즐기는 것이 가능할까? 스탠리 패러블의 맥락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오'다. 즐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불복종, 무행동, 심지어 게임을 망가뜨리려는 시도를 포함한 모든 상상 가능한 행동이 이미 예측되어 서사의 일부로 짜여 있기 때문에, 이 게임을 잘못되게 플레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게임의 핵심 명제는 잘못된 길이란 없으며, 오직 다른 이야기들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게임은 승리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전복한다. 완벽한 순종을 통해 도달하는 자유 엔딩은 공허하게 느껴진다. 가장 기억에 남고 통찰력 있는 순간들은 불복종으로부터 온다. 진정한 승리는 특정 엔딩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 서사, 그리고 상호작용성의 본질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얻는 것이다. 즐거움은 발견의 과정과 게임 시스템에 대한 지적인 참여에서 비롯된다.
결론적으로, 스탠리 패러블은 단지 영리하고 유머러스한 게임을 넘어, 비디오 게임이라는 매체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게임은 비디오 게임이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이야기가 어떻게 전달되고 경험되는지에 대해 적극적으로 질문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 글이, 그리고 이 게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잘못된 길은 종종 가장 흥미로운 길이며, 이는 비단 게임뿐만 아니라 예술과 삶 자체에도 적용되는 진리일 것이다.
오늘의 게임, 스탠리 패러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