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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완벽하지 않지만 괜찮은 하루들

조용한 기계 소리, 따뜻한 사람들의 눈빛

by 이숨

2월.
봄이 올까 말까, 여전히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계절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마음 한구석엔 아주 작은 온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왜였을까.
아마도 오랜만에 다시 시작된 ‘나의 일상’ 덕분이었을지 모른다.

출근을 결심하자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이들이었다.
방학 중인 첫째와 둘째, 그리고 아직 유치원생인 막내.
하원 시간이 늦어지면 어쩌나, 혼자 있는 시간은 없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걱정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믿는 만큼 아이도 자란다.’
이제 초등학교 3학년, 4학년이 된 두 아이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 생겼을 것이다.
아이들도, 나도 그동안 조금씩 단단해졌으니.

출근을 딱 결정한 순간, 나는 아이들 아빠에게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나, 8시간 일 시작했어.”
돌아온 것은 늘 그렇듯 익숙한 침묵이었다.
상황상 아이들을 챙길 수도 없고, 도움을 기대할 이유도 없었다.
서운함을 느끼기보다는, 이미 오래전에 체념해버린 감정이 잔잔하게 지나갔다.
그저 바랐다.
이 선택이 아이들과 나, 우리가 함께 잘 해낼 수 있기를.

아침 7시.
잠든 막내를 깨워 재빠르게 옷을 입히고, 밥은 차 안에서 먹였다.
작은 손에 쥐여준 밥 한 숟가락을 꾸벅거리며 받아먹는 아이를 보니
“미안하다”는 말이 목구멍 깊숙이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이 선택이 결국 우리 가족 모두에게 필요한 걸음을 내딛는 일이라는 걸,
언젠가 아이도 알게 되리라 믿으며 마음을 눌러 담았다.

유치원은 오전반이 있어 7시 반부터 아이를 맡길 수 있었다.
생각보다 많은 엄마, 아빠들이 나처럼 일찍 아이를 데려다놓고 출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문득 깨달았다.
‘나만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게 아니구나.’
그동안 나는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처럼 느껴졌고,
‘우리 아이들이 제일 불쌍한 것 같다’는 생각에 자꾸만 마음이 가라앉곤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사연 없는 집은 없고, 모두가 각자의 무게를 이고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첫 출근 날.
공장 문을 들어서자 가장 먼저 맞이한 건 기계 돌아가는 소리였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풍경 속,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손을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이 눈에 띄었다.
누가 봐도 ‘엄마’였다.
괜히 반가웠다.

작업 중 짧게 스치는 눈빛, 쉬는 시간에 나누는 짧고 낮은 대화들.
“아이 셋이요? 우와… 진짜 대단하세요.”
“저희 애도 유치원생인데… 아침 완전 전쟁이죠?”
누가 나를 특별히 챙긴 것도 아니지만,
서로의 처지를 ‘그냥 알고 있다’는 그 눈빛만으로 충분히 위로가 되었다.

기계 돌아가는 소음이, 사람들의 쓴소리보다 훨씬 조용하게 느껴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견디기 어려웠던 건 일이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걸.

일은 분명 고됐다.
반복되는 손놀림, 뻐근하게 굳는 어깨, 서서 보내는 긴 시간들.
그런데 마음은 이상하리만큼 편해졌다.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평화,
서로의 삶을 존중해주는 동료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해내고 있다’는 단단한 감각.

처음엔 나도, 아이들도 서툴렀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적응해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전화 한 번 걸어오지 않고 하루를 잘 보내주었고,
나는 퇴근길 차 안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늘도 잘 버텼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적어도 나는 내가 얼마나 애쓰며 살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까.
완벽하지 않아도, 흔들려도 괜찮았다.
하루를 온전히 살아낸 나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또 하루를 버텨냈다.
그리고 내일도 그렇게 버텨낼 것이다.
늘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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