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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이름 하나로 이어지는 마음

짧은 대화가 남긴 긴 여운

by 이숨

공장에서의 일이 익숙해지기 시작한 것은 어느 날 문득이었다.
기계 소리가 더 이상 낯설지 않고, 손이 해야 할 일들을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따라가던 시기.
사람들의 얼굴도 조금씩 익숙해지고, 서로의 이름을 하나둘 외우기 시작하던 때였다.

내가 일하는 곳은 늘 바쁘다.
불빛 아래에서 시간은 숨 가쁘게 흘러가고, 그 속에 있는 우리 또한 일에 몰두한 채 하루를 살아낸다.
바쁘다는 이유로 사소한 감정이나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틈이 없다.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은 단 몇 가지 — 이름, 기혼인지 미혼인지,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

그 정도면 함께 일하는 데는 충분했다.
내 마음도 그랬다.
일적으로 만난 사람과는 일적으로 끝내는 것이 편했고, 억지로 관계를 넓히거나 감정적으로 얽히고 싶지 않았다.
사는 게 이미 벅찼다.
내 안에서도 감정에 쓸 여력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던 시기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사람을 깊게 사귀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필요한 말만 주고받고, 퇴근하면 일터의 이야기는 그곳에 두고 나오는 삶.
그러는 편이 마음도, 생활도 편했다.

그날도 그랬다.
하지만 하루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날은 평소보다 일의 흐름이 잠시 느려졌다.
공장 바람도, 기계의 리듬도 잠시 쉬어가는 듯한 순간.
사람들의 손도 잠시 멈춤을 허락받았다.
이상하게도 그 여유는 분위기에도 스며들었다.

여유가 생기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누군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고,
또 누군가는 남의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올린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같은 공장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일하는 이들이기도 했다.

자녀를 키우는 이들이 많다 보니 대화는 금세 아이들 이야기로 향한다.
나 또한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이기에,
자연스럽게 대화 속에서 내 아이들 이야기를 하며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도 평범한 하루였다.
함께 일하던 언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잠깐만, 이름이 뭐라고 했지?”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그 이름이에요.”

사람들이 종종 헷갈린다.
내 이름은 남성적으로 들리는 이름이라, 처음 듣는 이들은 잠시 멈칫하곤 한다.
익숙했다.
이제는 그 반응 자체가 낯설지 않았다.

언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우리 아들이랑 이름이 같아.”

순간 웃음이 나왔다.
이름으로 이런 연결이 생긴다는 게 새삼 재밌었다.

“아드님은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언니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몇 살이지…?”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드님 나이도 까먹으세요?”

그때였다.
언니의 눈빛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언니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아들, 여기 없어. 천국에 있어.”

그 말이 끝나는 순간, 공장 안의 모든 소리가 멈춘 듯했다.
기계 소리는 그대로였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한순간 고요해졌다.

“죄송해요…”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벌써 오래됐어.”

하지만 ‘괜찮아’라는 말보다
울음을 참기 위해 씩 자르던 숨소리가 먼저 마음에 와닿았다.

언니는 천천히 아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태어났던 날, 걸음을 처음 떼던 날,
사소한 장난에 깔깔 웃던 얼굴,
장난스럽게 부르던 목소리.

말은 담담했지만
붉어진 눈시울은 그 마음을 끝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동료들도 조용히 고개를 숙였고
그 순간 우리는 아무 장식 없는 슬픔 속에 함께 서 있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슬픔.
나는 다 알 수 없다.
겪어보지 않은 마음을 함부로 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엄마로서
그 고통이 얼마나 깊을지,
얼마나 오래 가슴을 후벼팠을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저 안아주고 싶었다.
그 말도 안 되는 상실 앞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언니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달라졌다.

같은 공장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날 아주 작은 마음의 다리를 건넜다.
말은 짧았지만, 감정은 깊었다.
누군가의 가장 소중한 존재를 함께 떠올리는 순간은
그 자체로 마음을 이어주는 힘이 있었다.

이름 하나에서 시작된 연결.
단 몇 마디의 대화였지만
언니의 삶과 마음이 조금 보인 날이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는 언제 삶이 끝날지 모른다.
어떤 순간이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오늘의 하루가 마지막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래서
오늘을 잘 살아야 한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다가가야 한다.
잠시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마음으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일터에서의 언니를 바라보며
나는 나 자신에게도 다짐했다.

오늘 하루를
내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로.
오늘의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그날, 나는 좋은 엄마였다.
그리고 내일도
그다음 날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짧은 대화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오래 남는 이야기가 있었다.
우리는 전부 혼자 살아가는 것 같지만
어쩌면 아주 작은 순간들로
서로에게 닿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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