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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잠깐의 아픔, 그리고 아이와 보낸 하루

아이와 함께한 오늘, 그리고 나

by 이숨

둘째가 아프다. 초등학생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 손길이 필요한 아이. 아기 때 열경련을 겪은 이후로 거의 열이 난 적 없던 그 아이가 새벽에 갑자기 끙 소리를 내더니, 체온계에 38도가 찍히는 순간 내 마음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평소엔 누구보다 건강하게 뛰어다니던 모습이 스쳐 지나가지만, 지금은 얇은 이불 속에서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작은 몸을 떨고 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눈을 뗄 수가 없다. 잠결에 해열제를 챙기며, 손끝으로 아이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다.

차갑게 적신 수건을 이마 위에 올리고, 내 손을 그 위에 살짝 얹는다. 체온계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부디 내려가라’는 마음속 기도가 배어 있다. 숫자가 내려가길 간절히 바라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이 천천히 자리를 잡는다.

오늘 일을 가야 할까. 돈을 벌러 나가야 할까. 아니면 그냥 아이 곁에 있어야 할까.
머릿속에서는 끝도 없이 질문이 맴돈다.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허둥대고, 현실과 감정이 서로 끌어당기며 흔들어댄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쉬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몇 주째 쌓여 있던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오며 ‘잠시라도 나를 쉬게 해주면 안 될까?’ 하는 작은 바람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하지만 바램과 현실은 늘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둘째는 지금 내 손길이 가장 필요했고,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그 짧은 몇 분이 참 길게 느껴졌다. 핸드폰을 들고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내 모습이, 왠지 모르게 미워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국 마음은 한 곳을 가리켰다. 회사에 연락해 아이가 아프다며 하루 연차를 쓰기로 했다.

연차 신청 버튼을 누르는 순간, 마음은 동시에 가벼워지고 무거워졌다. 그래도 오늘만큼은 돈보다 아이였다.

나는 그렇게, 그 하루를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선택하기로 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도 길지 않다는 사실이 무겁게 느껴지지만 동시에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 아이에게 온전히 하루를 내어줄 기회가 언제 있었던가 하고 곱씹으며 숨을 고른다.

아픈 덕분에 아이와 온전히 하루를 보내며 나 자신에게도 쉼을 허락할 수 있었다.

하루를 걱정과 돈 문제로 시작하려던 마음은 잠시 내려놓기로했다.

평소엔 셋을 돌아가며 챙기다 보니 누군가 아플 때에서야 한 아이에게 온전히 시간을 내주게 되는 것이 늘 미안했다.
그래서일까, 오늘따라 둘째의 뜨거운 이마를 바라보며 마음 한쪽이 무겁게 저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이가 아플 때면 우리 넷의 마음은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 첫째는 조용히 둘째 옆에 앉아 작은 장난으로 분위기를 풀어주고, 가끔은 나를 올려다보며 다정한 눈빛을 보낸다. 그 눈빛 속엔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누나로서의 책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직 어린 아이인데도, 동생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레 피어나는 모습이 어찌나 대견한지 모른다.

셋째도 오빠의 상태를 아는지 작은 손을 내밀어 오빠 이마를 조심스레 짚어본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고 애틋한지, 잠시 모든 걱정이 잦아드는 듯했다.

세 아이가 서로를 챙기고, 금세 장난으로 웃음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문득 마음이 뭉클해진다.

‘이 아이들을 낳길 참 잘했다.’

그 생각이 스치고 나면 자연스럽게 또 하나의 마음이 생긴다.

‘더 잘해주자. 이 예쁜 순간들을 오래 지켜주자.’

그렇게 두 아이를 집에 남겨두고, 나는 둘째의 손을 잡은 채 병원으로 향했다.
둘이서 나서는 길이 하필 병원이라는 사실이 마음 한편을 무겁게 눌렀다.
아이가 아플 때에서야 제대로 시간을 내줄 수 있다는 게 늘 미안했다.

‘그래, 지금은 아이가 먼저다. 아픈 아이에게 집중하자.
이렇게라도 아이 곁에 있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자.’
스스로에게 그렇게 다독이며 걸음을 옮겼다.
돈은 또 어떻게든 들어올 것이고, 길도 결국엔 열리리라는 작은 믿음에 기대면서.

그날만큼은 돈 걱정을 내려놓자고 마음먹었지만, 사실 쉽지 않았다.
시급제로 일하는 하루는, 단 하루 빠진 것만으로도 다음 달 통장 잔고에 큰 차이를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괜찮아. 지금은 둘째에게 집중하자.’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아이 곁을 지켰다.

병원에서 열이 높아 수액을 맞는 동안, 나는 둘째에게 무엇이 먹고 싶은지 묻기도 하고, 학교 생활은 어떤지 조심스레 물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둘이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문득 이런 시간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깨닫게 되었다. 아플 때가 아니면 이렇게 오래, 이렇게 깊이 아이와 마주 앉아 이야기할 틈이 없었던 것 같아서… 그 시간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아이가 아프면 당연히 곁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보니, 아이들이 어릴 때는 늘 내 곁에서 나를 찾았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언제든 달려가 안아줄 수 있는 그 시간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이제야 더 깊이 알게 되는 것 같다.

수액을 맞고 집으로 돌아오니, 둘째의 열이 금세 내려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새벽부터 마음을 쥐고 흔들던 불안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아이의 숨결이 한결 가벼워 보이는 것만으로도 내 어깨의 긴장이 풀어지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자 둘째는 소파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였고, 나도 조용히 숨을 고르며 밀린 집안일들을 천천히 정리했다. 빨래를 개고, 바닥을 쓸고, 싱크대에 쌓여 있던 그릇들을 씻어내며 문득 생각했다.
‘아침의 그 혼란스러움이 이렇게 다른 평온함 속으로 이어질 수도 있구나.’

두 아이가 돌아오기 전에 저녁을 준비했다. 평소 같으면 대충 차려내기 바빴겠지만, 오늘은 왠지 더 정성을 들이고 싶었다. 아픈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이 나를 조금 부드럽고도 느긋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냄비에 국물이 자작하게 끓고, 팬 위에서 고기 굽는 소리가 따뜻하게 울려 퍼지며 집 안 공기가 서서히 포근해졌다.

그날 저녁은 유난히 맛있었다.
재료 때문도, 레시피 때문도 아니다. 온전히 반나절 동안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낸 둘째의 마음이 편안해져 있었고, 그 편안함이 식탁 위에 그대로 퍼져 있는 듯했다. 둘째는 누나와 동생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환하게 웃으며 따뜻하게 맞이했다. 작은 몸에서 그런 온기가 나오는 걸 보며, 마음이 찡하게 울렸다.

‘한 사람이 나만 바라봐주는 시간.’
그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아이를 통해 다시 배웠다.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우는 일은, 결국 나에게도 온기를 되돌려주는 일이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살아가는 팍팍한 현실 속에서 불안은 늘 나와 등을 맞대고 앉아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그 불안이 아이들의 웃음과 말투, 따뜻한 눈빛 속에서 서서히 녹아내렸다.
둘째가 나를 통해 위로받고 채워진 것처럼, 나 역시 아이들을 통해 편안함과 고마움으로 마음을 채웠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온기를 품은 채, 길었던 하루를 조용히, 그렇게 불안과 고마움이 뒤섞인 하루는 부드러운 숨을 내쉬듯 마무리를 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니, 하루가 길게 내 어깨 위에 내려앉은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히고, 마음이 갈라질 듯 흔들리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을 끝까지 살아냈다.

불안과 걱정, 피로가 나를 짓누르던 시간 속에서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작은 손을 잡아주고, 뜨거운 이마를 식히고, 아이가 편안히 숨 쉬는 모습을 지켜보며, 마음속 깊이 감사함이 차올랐다.

고맙다, 나 자신아.
오늘 하루,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버티고 지켜낸 너에게,
누구보다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힘들었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하루.
이 하루가 나에게, 또 아이들에게, 조용하지만 깊은 온기를 남겼다.
오늘의 나를 안아주며, 내일을 맞을 힘을 조금씩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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