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글들이 나와 아이들에게 여유있는 삶을 주길
아이들의 작은 반응에도 귀를 기울이며 사는 삶은 예상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아이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신호를 보낸다.
입술이 삐죽 나온 얼굴, 작은 한숨, 책을 덮어두고 멍하니 앉아 있는 모습, 혹은 “엄마, 이거 좀 봐!” 하고 부르는 목소리.
그 모든 순간들이 아이들에게는 지금 바로 엄마가 필요한 시간이었다.
나는 늘 그 신호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부족한지 빨리 알아차리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다.
엄마라는 자리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면서도, 표현하지 않는 감정들을 참 많이 품게 하는 자리였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바빴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 준비를 해야 했다.
책가방을 열어 숙제를 챙기고, 아이들의 하루를 들어주고, 빨랫감을 돌리고, 집 안을 정리하고 나면
어느새 밤은 깊어 있었다.
하루는 산처럼 쌓이고, 나는 그 위를 매일같이 넘어서야 했다.
아이들이 잠든 뒤 침대에 누우면 생각이 문처럼 열린다.
“나는 오늘도 나에게 시간을 내어주지 못했구나.”
그날 하루의 나는 온전히 ‘엄마’로만 존재했다.
회사에서는 직원, 집에서는 엄마, 살림하는 사람.
그 중 어디에서도 나는 나로 남아 있을 틈이 없었다.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위한 시간은 어디에 있을까?’
아마 대부분의 엄마들은 비슷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하루동안 나를 한 번이라도 돌보고 있나?’
‘내 감정은 누구에게 들려주고 있나?’
‘나는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버티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글쓰기를 좋아했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나만의 호흡을 되찾을 수 있었다.
현실에서 미처 다 표현하지 못한 감정들을
글이라는 공간 안에서는 있는 그대로 꺼낼 수 있었다.
억울함도, 두려움도, 서러움도, 또 가끔 찾아오는 희망도.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나를 위한 공간이 필요했고,
그 공간은 스스로 만들어내지 않으면 절대 생겨나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아이들이 잠들고 집안일이 끝난 늦은 밤?
그때는 이미 몸이 너무 지쳐 있었다.
모든 것을 마치고 나면 글을 쓰기는커녕 앉아 있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침?
아이들이 일어나기 전, 세상이 아직 깨어나기 전.
그렇다면 그 시간은 언제인가.
나는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유일한 내 시간은 새벽 5시 30분.
아직 해가 뜨기 전, 창밖이 캄캄한 그 시간.
거실 불을 하나만 켜면 집안은 고요했고,
그 고요함은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나’라는 존재를 깨워주었다.
이불 밖으로 나오는 일은 쉽지 않았다.
오늘도 하루가 또 시작되는구나 싶어 답답할 때도 있었고,
아직 덜 깬 눈을 억지로 뜨려다 다시 감고 싶을 때도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눕는 것이 앉는 것보다 쉽고,
앉아 있는 것이 일어나는 것보다 쉽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른 새벽에 스스로 걸어나와
책상 앞에 앉는다는 것은 이미 하나의 용기였다.
하지만 책상 앞에 앉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방 안의 공기는 차고 조용했다.
그 시간에는 누구도 나를 부르지 않았다.
아이도, 집안일도, 일도, 문제도 모두 잠들어 있었다.
오직 나만 깨어 있는 시간.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
그 짧은 시간에 나는 호흡을 되찾았다.
흩어져 있던 생각들이 정리됐고
내 마음 깊은 곳에 쌓여 있던 감정들이 글 위로 올라왔다.
글을 쓰며 나는 다시 살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엄마들도 쉬어야지.”
하지만 쉬는 것은 누군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내야 했다.
그 시간을 빼내지 않으면
하루는 나를 위해 한 조각도 남지 않았다.
새벽의 10분, 혹은 30분.
종이에 써내려간 글이 많지 않을 수도 있었다.
때로는 한 줄만 쓰고 끝나기도 했다.
어떤 날은 한 문장을 20분 동안 붙잡고 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글의 양이 아니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나를 살아가고 있다”는 감각을 회복했다.
그 감각이 하루를 버틸 힘을 주었다.
아이들은 예민하다.
엄마의 감정이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금세 알아챈다.
아이들이 아무 말 없이 다가와 안기면
나는 문득 마음이 찔릴 때가 있었다.
‘아, 내가 오늘도 너무 버티면서 살았구나.’
하지만 새벽에 나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날은 달랐다.
마음에 작은 빈 공간이 생겼다.
그 빈 공간은 하루를 흡수하고 버틸 여유가 되어 주었다.
아이들의 작은 다툼에도 마음이 덜 흔들리고
사소한 말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이들과의 관계가 달라졌다.
아이들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하더라도
나는 조금 더 차분하게 바라볼 수 있었다.
“왜 그랬어?” 하고 다그치기보다
“힘들었구나.” 하고 먼저 마음을 읽어줄 수 있었다.
내가 나를 다독이는 만큼
아이들의 마음도 받아줄 여유가 생겼다.
아이들은 엄마의 마음이 편안하면 금세 알아챈다.
내가 조금 더 부드러워진 날이면
아이들 역시 한결 차분하고 유난히 잘 웃었다.
이런 날은 온 집안의 공기가 가볍고 부드러웠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나를 챙기는 일은 이기심이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다는 것을.
엄마가 버티며 살아가면
아이들도 버티며 자라게 된다.
엄마가 숨을 쉬며 살아가면
아이들도 숨 쉬는 법을 배운다.
새벽 5시 30분의 시간은
나를 위한 시간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아이들을 위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 시간은 나를 비워내고 채워 넣는 시간이었다.
삶이 아무리 버겁고 현실이 매서워도
그 새벽의 시간만큼은
내 삶을 견딜 수 있는 작은 숨을 만들어주었다.
사람들은 말한다.
“하루 10분이 뭐 얼마나 달라지겠어.”
하지만 나는 안다.
그 10분이
어떤 사람에게는
전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 시간에
다시 살아가기 위한 힘을 얻었다.
나로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힘으로 또 하루를 살아냈다.
오늘도 새벽 알람이 울릴 것이다.
어쩌면 몸은 무겁고 눈은 쉽게 떠지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안다.
새벽 5시 30분의 책상 앞에 앉는 순간,
그 하루는 이미 나를 살릴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또 한 번
나에게 속삭일 것이다.
“괜찮아, 오늘도 너에게 시간을 내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