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이도 가끔 먹이시나요?
산다는 건 배고픈 일이었다. 우린 자주 배고픈 상태가 됐다. 배불리 먹은 포만감이 주는 잠깐의 행복함 때문에 누군가는 너무 많이 먹거나 자주 먹으면서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처음 어느 정도의 배고픔은 견디겠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배고픔은 당장 해결 해야 할 강렬한 욕구가 됐다. 그 당연한 욕구가 해결되지 못할 때 느끼는 '배고픔'은 단순히 물리적인 배고픔을 넘어 더 복잡한 상태의 '허기'가 될 수 있었다.
긴 연휴 동안 집안에 있는 물건을 재배치했다. 비워서 여유 공간을 들이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번 정리의 핵심은 집안에 있는 물건 위치를 아이들이 정확히 알도록 하는 것이었다. 집안 정리가 되지 않았거나 정리가 됐어도 살림하는 사람만 알고 있는 구조에선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마다 ‘엄마’가 소환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에 있어 아이가 소속감을 느끼고 주체적으로 행동할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일이 필요했다.
내가 먼저 달라져야 했다.
아이의 자퇴를 실행에 옮긴 일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을 두고 아이와 의논해 결정한 일이지만 보호자로서 책임질 부분이 더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퇴 목적이 제때 자고 먹는 기본적인 삶을 지키고 싶던 이유인 만큼 일상의 변화는 당연했다. 정리할수록 간결해지는 삶을 아이와 함께 하기 위해선 나부터 몸에 밴 습관을 바꾸려 노력해야 했다. 말로만 가르치는 어른이 되지 않으려면 익숙한 삶의 태도를 바꿀 의지가 필요했다. 갈 길이 멀고 고된 일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절실한 문제였다.
더 이상 설거지나 빨래 정리, 쓰레기 분리수거 같은 가족 공동의 일을 하는 데 있어 공부나 그림 그리기 등이 면피의 사유가 될 수 없었다. 집안일은 구성원으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며 함께 노력해야 할 협조 사항임이 확실해졌고 공부도 일상의 일부일 뿐이었다. 설거지를 끝낸 아이는 이제 말하지 않아도 그릇의 물기를 바로 닦아 원래 있던 자리에 정리해 둘 줄 알게 됐다.
요즘 사회는 불안정하다. 제때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며 쌓아 올린 탑이 몹시 위태롭게 유지되거나 앙상한 골조를 드러낸 것 같은 모습이 자주 목도됐다. 물질적 여유의 유무를 떠나 정신적 가치나 상호 간 공감이 배제된 미래는 어둡다. 때론 나만 힘든 것 같은 삶이었지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우리는 모두 힘들다. 누구만 어느 시기에 힘든 것도 아니었다. 태어난 존재는 생애주기를 통과할 때마다 새로운 어려움을 겪느라 모두 힘든 게 사실이었다.
어른 삶이 흔들릴 때 아이들 삶만 무사할 수 없었다. 물질적으로 남겨줄게 많지 않은 양육자 입장에선 답이 좀 더 명확했다. 새로운 물건이 끝없이 쏟아지는 시대는 우리에게 절대 '완성된 만족'을 줄 수 없다. 그것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이 눈앞에서 달아나고 말 신기루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미디어에선 수없이 많은 방법으로 질문한다. '너, 이거 필요하지 않아? 갖고 싶지 않아? 너만 없는데 괜찮아?' 공격에 가까운 꼬드김과 부추김을 이겨 낼 내공이 필요했다. 우린 스스로 주도하는 삶을 배우며 미래를 대비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꼭 경험해 봐야 할 맛이 있었다.
상처 없는 결핍의 맛
평생 트라우마로 남을 결핍은 안될 일이지만,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도 ‘결핍‘이었다.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그 맛을 본 아이는 결국 단단한 내공을 장착하게 될 것이었다. 한 존재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 마음은 선명히 보여주되 결핍의 맛 보이기를 망설이거나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