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삶
요약 문장:
어른들은 중요한 설명을 자주 건너뛰었다. 바쁘기도 했지만,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 거라는 착각이 만든 오해가 컸다.
상처를 오래 품고 있자 그것이 내 일부가 됐다. 지우지 못한 상처는 나의 언어가 됐고, 그 언어는 다시 다른 상처들을 불러냈다. 그동안 나는, 내게 말을 걸어오던 기억에 의존해 글을 써왔다. 대부분 어린 시절의 외로움이나 존재를 부정당했던 시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기억이 내 삶을 어떻게 빚어냈는지 꺼내보는 작업이었다. 그 시간은 내게 더 이상 그 기억에만 머무를 수 없다고 말해주었다. 그것은 온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지만, 이내 내게 할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속삭였다. 상처는 상처를 잘 알아봤다. 내 상처가 이젠 타인의 상처에 손내밀 때였다. 그것이 상처를 영원히 상처로 남기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나는 오해를 푸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 안의 기억으로 타인의 아픔을 번역할 수 있다면, 그건 내 지난 시간의 고통이나 외로움이 헛되지 않은 증거였다. 삶은 여전히 불완전하고, 누구나의 마음엔 설명되지 못한 오해가 살았다.
풀리지 않는 오해는 결코 오해로만 끝나지 않았고, 존재의 삶을 그늘아래서 쪼그라들게 했다. 나는 내가 만났던 아이들과 양육자 간에 생긴 서로의 오해를 풀 열쇠를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정리되지 못한 양육자 마음은 아이에게 영향을 줬다. 필요 이상 화를 낸 뒤 후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뱉어서 아이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그 때문일까? 마음이 어지러운 양육자를 둔 아이는 자주 길을 잃었다.
글쓰기 수업에서 아이들은 마음에 담긴 응어리를 자주 꺼내 놓았다. 아이들의 철없는 투정으로 보기엔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들도 있었다. 안타까운 점은 대부분의 상처가 양육자의 무심한 태도나 잘못된 대화 방식에서 기인됐다는 점이다.
가끔 나는 양육자가 훈육과 허용의 경계를 잘 모르는 건 아닐까? 의구심이 생겼다. 따끔한 훈육이 필요해 보일 때는 어물쩍 넘어가고, 허용해도 될 일에선 호되게 야단치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 마음엔 억울함이 먼지처럼 쌓였다. 가장 소중한 관계임에도 우린 어째서 마음을 제대로 전할 수 없는지, 과연 쌓인 오해는 그대로 놔둬도 괜찮은 것일까?
한 학교에서 어린이 인권 강의를 할 때였다.
“선생님, 엄마, 아빠는 맨날 영혼 없이 대답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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