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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라지 난 남편

by 애지

정말 1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인데요. 오늘 남편이 꼬라지가 났습니다. 근데 그 모습조차 너무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자꾸 웃음이 나왔어요.


오늘은 퇴근 후 잠실에서 데이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오랜만에 둘이 시내에서 데이트를 할 생각에 설렜어요. 세일 기간인 무인양품도 가고 룰루레몬, 코스도 가서 남편 예쁜 옷도 사주고 싶고 읽고 싶은 책이 있으면 서점 가서 책도 사주고 싶고, 남편이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도 먹고 할 생각에 신이 났습니다.


아침에 같이 회사 앞으로 갔어요. 마침 출근시간까지 여유가 있어서 남편 손을 잡고 석촌호수 근처까지 걸었습니다. 파아란 하늘아래 알록달록 아름답게 물든 석촌호수의 단풍을 남편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는데 오늘 보여줄 수 있어서 정말 기뻤어요. 흔들의자에서 남편과 잠시 앉았다가 저는 출근을 하고 남편은 아침 여유를 즐겼습니다.


오후에는 단축 근무로 4시에 칼퇴근을 하고 남편을 만나러 바로 롯데월드몰로 달려갔습니다. 멀리서 오는 남편을 먼저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남편을 불렀어요. 밖에서 보니 더욱 반가운 남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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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양품에 가서 호두가 태어나면 분유포트기 등 새롭게 들일 가전제품을 놓을 부엌장을 구경했어요. 한 손을 주머니에 척! 하고 꽂은 채 진지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정말 멋있어서 사진을 안 찍을 수 없었습니다.


"여보, 이거 어떤거 같아? 나는 딱 좋은 것 같은데."

"그래? 나는 가구는 잘 몰라서. 여보가 좋으면 다 좋아!"


"저기서 커피 한 잔 할까?"

"응, 좋아!"


남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좋아를 연발하는 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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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코스로는 코스에 가서 남편에게 이런저런 다양한 스타일의 아우터를 권해봤어요. 제 눈에는 뭐든지 다 멋지게 잘 어울리지만 여러 옷을 입다 보니 확실히 예쁜 옷이 뭔지 눈에 띄어서 신기했어요.


저녁으로는 남편이 일본 출장에 갈 때마다 하네다 공항에서 맛있게 먹었던 우동 식당이 잠실에서 생겼다며 먹자고 제안하길래 바로 좋다고 대답했습니다. 평소 딱히 뭐가 먹고 싶다고 말하지 않던 남편이어서 뭔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게 반갑게 들렸어요.


평소 밀가루를 잘 먹지 않는 저였지만, 남편이 먹고 싶다면 밀가루 할애비가 와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습니다.


"여보, 저녁은 저기서 먹을까?"

"좋아!"


그렇게 저녁도 맛있게 먹고 집에 가려고 택시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도로 한복판으로 보이는 곳으로 택시를 부른 거예요. 저는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아니, 무슨 위험하게 도로 한복판으로 택시를 부르고 그래. 위험하게."


그러자 남편이 저를 돌아봤습니다. 그때 바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우리 남편 꼬락서니 났구나.'

1년에 한 두번 있을까 말까한 날입니다. 근데 저는 싫지만은 않았어요. 그 모습조차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거든요.


다만, 남편을 속상하게 한 점이 미안할 따름이었습니다. 생각해보니 남편은 아침 9시부터 나와서 삼성역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몇 시간이나 돌아다녀 힘든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저를 임산부 요가에 데려다주고 pc방에 가서 오버와치 게임을 하고 왔는데, 최근에 연패로 인해 기분이 상당히 안 좋은 상태였어요.


테슬라 주식도 얼마전에 수익이 나서 팔까말까 고민하다가 더 큰 욕심에 안 팔았는데 며칠 째 하락하면서 마이너스가 되어서 더 예민한 상태였습니다.


"아니 별로 위험하지도 않은 길인데 그래요."

"아, 미안, 미안해요. 우리 남편 꼬라지 났네. 피곤하구나."

"아침 8시부터 나와서 지금 12시간째 밖에 있어서 힘든데, 오전에도 박람회 다녀오고. 오늘 오버워치도 연패했어요. 다이아몬드 등급까지 떨어졌는데."

"아, 그러네. 내가 생각을 못했네. 근데, 다이아몬드면 좋은거 아니에요? 아, 아니다. 미안, 미안해요.

미안해요. 우리 남편 꼬라지 나게 해서. 오구, 힘들었구나.

집에 가서 반신욕 물 받아줄까요?"

"됐어요."

"내가 잘못했네. 남편 힘든데 자꾸 뭐라고 하고."


저를 슬쩍 째려보는 남편 얼굴이 너무 귀엽더라고요. 집에 도착하면 어깨랑 발도 주물러주고 남편이 좋아하는 등 긁어주기도 하면서 마음을 좀 풀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남편의 토라지고 삐진 모습이 왜 이리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가끔 일부러 토라지게 만들어야겠습니다. 그럼, 이만. 남편이 좋아하는 등 긁어주러 가야겠습니다.


혹시, 배우자가 토라지거나 삐지면 같이 삐지기 전에 그 모습을 귀엽게 한 번 바라봐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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