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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Aug 29. 2024

장편 소설 <아무는 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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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하늘에서 또 쓰레기 내려오네.”


  블랙 헤일을 긁어모으고 있던 군인 한 명이 투덜거렸다. 눈이나 낙엽보다야 덩어리져 있으니 모으기 쉬울지 몰라도 일이 더 느는 것은 반갑지 않았다. 게다가 눈과 낙엽보다 위험하기까지 했다. 머리에는 철모를 쓰고 있다고 해도 옛날의 장수들처럼 몸 전체에 갑옷을 입을 수는 없으니 어깨와 등에 떨어지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뼈만 부서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블랙 헤일에 맞을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이를 악물었다. 군대 와서 고작 우박 때문에 다치면 답이 없다. 무조건 안 다쳐야 했다. 다치면 다친 사람만 손해였다.


  “제길, 눈에서 벗어난다 싶었는데 망할 놈의 우박이라니.”

  이제 겨울에 함박눈은 많이 와야 두어 번이라 눈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복병이 있었다. 푸는 대상만 달랐을 뿐 무한 삽질을 하는 것은 같았다. 눈도 자주 안 오니 앞으로 제설 작업을 민간 업체에 맡긴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복지 향상과 더불어 눈이 다시 낭만의 상징으로 돌아오기를 희망차게 기다렸던 군인들은 블랙 헤일 처리 업무에 차출되자 인생은 마이너스 일 플러스 일, 그렇게 영점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절감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블랙 헤일들이 한차례 지나가고 나면 일이 시작되었다. 한 줄로 서서 구령에 맞추어 블랙 헤일들을 삽에 푸고, 자루에 담고, 다시 삽에 푸는 일이 반복되었다. 자루들은 금방 가득 찼다. 블랙 헤일이 들어간 자루들은 트럭으로 옮겼다. 처음에는 투명하고 검은 블랙 헤일을 보석처럼 바라보던 군인들도, 그 블랙 헤일이 햇빛에 반사되어 석영처럼 빛나는 것에 홀렸던 군인들도 곧 기계처럼 블랙 헤일들을 퍼서 담기 시작했다. 블랙 헤일은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었다. 블랙 헤일 지옥이었다.     



  동민은 사흘 만에 블랙 헤일의 모서리를 전부 다 깎았다. 공처럼 반들반들해졌다. 그동안에도 기성은 굴에 오지 않았다. 기성이 굴에 오지 않은 간격이 늘어날수록 남 노인의 말수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민형과 기성의 소식을 가지고 온다고 했던 유희도 오지 않았다.

  유우 2세는 동민이 내민 블랙 헤일을 두 손으로 받았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블랙 헤일의 겉을 만지작거렸다. 곧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표면이 거칠어서 그런 것 같았다. 세상살이의 맛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촉감 놀이를 할 때 밀가루 반죽처럼 부드러운 촉감부터 익히는 것과 달리 거친 촉감부터 배우는 셈이었다. 


  기성이 오랫동안 오지 않았기 때문에 남 노인의 통조림은 얼마 남지 않았다. 참치 통조림 작은 것 한 개가 전부였다. 유우는 옥수수 통조림 한 개를 남 노인에게 주었다. 어차피 기성이 통조림들을 잔뜩 사 들고 올 테니 그때 남 노인에게서 통조림을 받으면 되었다. 빌려주고 갚는 의미가 필요 없는 사이였다. 남 노인은 유우가 열어 준 옥수수 통조림을 묵묵히 숟가락으로 퍼먹었다. 


  “슈슈, 슈슈.”

  유우 2세가 남 노인의 옆에서 옹알거리자 남 노인은 옥수수 알갱이 몇 알을 숟가락으로 건져 유우 2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유우 2세가 오물거리면서 옥수수를 씹었다. 입으로는 옥수수를 씹으면서도 손으로는 블랙 헤일을 계속 굴리고 있었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남 노인이 그제야 살짝 웃었다. 유우 2세도 옥수수를 입에 넣은 채 입을 벌리며 웃었다. 잘게 잘리지 않은 노란 옥수수 알갱이들이 훤히 보였다. 유우는 유우 2세의 입가에 흐른 침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유희가 빨리 와야 할 텐데 이상하게 소식이 늦네요.”

  “매일 학교 다니는 학생이 어떻게 한가할 수 있겠어? 바쁜 게 당연하지.”


  선희가 눈치를 보면서 말하자 남 노인이 무심한 척 답했다. 남 노인의 손이 떨리는 것을 유우는 놓치지 않았다. 유우도 지금 덤덤한 척하고 있지만 민형의 소식을 알고 싶어 속이 탔다. 뉴스를 보고 싶었다. 그 후에 민형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인터넷도 안 되고, 휴대폰조차 없어 세상과 완전히 소식을 끊고 사니 이럴 때는 답답했다.


  “저, 오늘도 만약 유희가 안 오면 아무래도 내일 한번 나갔다 와야겠어요.”

  “그런 뉴스까지 나온 마당에 밖에 나가면 너무 위험하지 않을까요?”

  동민이 말렸다. 유우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에서 기다리기만 했다가는 금방이라도 말라 죽을 것 같아요. 당장이라도 얼굴을 볼 줄 알았는데 만약 앞으로 영영 못 보게 된다면…….”

  “부정 타는 소리를 미리 할 필요는 없어. 엄밀히 말하자면 민형 군은 아무개가 아니잖어. 금방 풀려나겠지.”

  “제 이름을 댈 사람이 아니에요. 차라리 자기가 아무개라고 할 사람이죠.”

  “일단 오늘까지는 기다려 보자고. 안 되면 나갔다 오는 게 마음 편하겠지.”


  남 노인이 불안한 마음을 억누른 채 말했다. 유우 2세가 남 노인의 품에 달려들었다. 남 노인이 유우 2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선희와 유우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헬멧 회사에서 생산된 헬멧들이 동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대량으로 찍어 낸다고 해도 그 많은 사람에게 헬멧을 보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헬멧값은 나날이 치솟았다. 결국 정부에서는 보급형 헬멧을 생산하기로 했다. 영국에서 친환경 콘셉트로서 자전거용 헬멧으로 무료 보급한 신문지 헬멧을 본떠 만든다고 했다. 폐신문지를 모아서 반죽한 뒤 틀에 찍어서 오븐에 굽고 끈만 달면 되는 거라 빠른 시간 안에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그 헬멧이 과연 하늘에서 내리는 블랙 헤일을 온전히 막아 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맨머리로 다니는 것보다는 신문지 헬멧이라도 쓰고 다녀야 밖에 나갈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일회용 마스크와 비슷했다. 미세먼지를 완벽하게 막아 줄 수는 없겠지만 안 쓸 수 없다는 점에서 비슷했다. 보급형 헬멧은 헤스크(Heask)라고 불렸다. 헤드+마스크, 머리에 쓰는 마스크였다. 


  이런 헤스크들을 누가 만들지가 문제였다. 결정권자들은 이런 점에서 머리를 잘 썼다. 폐터널을 수색해서 아무개들을 잡아 오라는 이유가 있었다. 명분은 아무개들의 자립을 도와준다는 거였다. 속뜻은 헤스크를 생산할 노동자들을 모집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첫 번째 아무개로 경찰서에 들어와 있는 민형은 이미, 가장 먼저 헤스크 노동자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사실을 모르는 민형은 주는 밥 잘 먹고 있는 데서 잘 잤다. 자신의 마음을 위해서도, 자신을 지켜보는 경찰들을 위해서도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야 했다. 그러면서도 바깥을 계속 주시했다. 경찰서를 지키고 있는 경찰 한 명 외에는 아무도 없어서 경찰서는 고요했다. 심각한 범죄라도 일어난 것일까. 민형은 불안해졌다. 그나마 자신에게 말을 많이 걸어 친근해 보였던 박 형사도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민형은 못 참고 설렁탕을 넣어 주던 경찰에게 물어보았다.

  “다들 어디 가신 건가요?”
   “그런 건 알 필요 없고, 주는 밥 꼬박꼬박 잘 먹어. 앞으로 힘써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경찰이 무심코 던진 말에 민형은 놀라서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챌그랑, 소리에 경찰도 놀랐다. 경찰은 아차 싶었는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방금 한 말은 잊어버려. 그냥 잠시 쉰다고 생각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나도 몰라. 빌어먹을, 하늘에서 이상한 게 떨어지기 시작한 뒤부터 늘 불안하다니까. 금방이라도 뭔 일 생길 것 같고.”


  경찰은 그 말만 던지고 나가 버렸다. 민형은 고개를 숙였다. 힘을 써야 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혹시 뉴스에서 말로만 듣던 염전 노예가 된다든가……. 민형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런 최악의 결말은 실수로라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경찰은 자리로 돌아가면서 고개를 약하게 저었다. 가벼운 입이 실수하지 않게 조심해야 했다. 불안을 잊기 위해 복권을 꺼냈다. 헤일 복권이었다. 한꺼번에 삼십 장이나 샀다. 불안을 없애려면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게 제일이었다. 당첨된다면 일석이조일 것이다. 이 나라에서 어떻게든 살아 보려고 해도 날씨까지 안 도와주니. 이민이든 방랑이든 이곳을 뜨고 싶었다. 다 때려치우고 캠핑카 하나 사서 세계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싶었다.


  경찰은 지갑에서 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 쌓인 복권을 하나씩 힘찬 동작으로 긁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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