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혜린 Aug 29. 2024

장편 소설 <아무는 개> (19)

5 (2)

5 (2)






  건물 안에 들어가자 초등학교에 다녔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이 나타났다. 학년과 반이 적혀 있는 팻말도, 교실 바깥에 있는 신발장도, 교실 안에 있는 책상과 의자도, 교실 뒤에 붙어 있는 아이들의 그림들도 그대로였다. 공부하고 먹고 뛰놀아야 할 아이들만 없었다. 그림 속에 삐뚤게 적힌 아이들의 이름만 남았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다.”

  날카로운 남자가 가리킨 곳은 체육관이었다. 복도 끝을 돌자 체육관이 나타났다. 체육관이지만 농구 코트 하나 없었다. 아무개들은 다시 일렬로 섰다. 군기가 든 훈련병처럼 줄이 잘 맞았다. 두리번거리면서 주변을 살펴보았다. 체육관에는 운동 기구나 매트도 없었다. 미끄러운 바닥과 높은 천장만 남아 있었다.


  대신 체육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새로운 풍경이 보였다. 양쪽에 요새는 잘 안 보는 종이 신문지가 잔뜩 쌓여 있었다. 신문지는 백 센티미터 정도 되는 높이로 체육관 양옆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큰 통이 네 개 있었다. 동네에 있는 공중목욕탕에 가면 볼 수 있는 냉탕 크기 정도 되는 것 같았다. 통과 통 사이에는 철제로 된 긴 책상이 있었다. 철제 책상 위는 노끈 꾸러미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정면에는 빔프로젝터로 프레젠테이션 화면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역시 체육관과 어울리지 않았다. 민형은 소리 내서 제일 위에 있는 제목을 읽었다. 


  “……신문지 헬멧 만드는 법.”


  “어때, 좋지? 너희들이 열심히 일해야 그만큼 국민들이 안전한 거야. 신문지도 재활용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1인 1 헬멧을 전부 보급하는 그날까지!”

  “그러니까, 보급형 헬멧을 만드는 임시 공장이라는 거군.”

  날카로운 남자가 하는 말에 한 남자가 말했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아까 트럭에서 가장 바깥쪽에 앉았던 남자였던 것 같았다.

  “장기원이오.”

  그 남자가 갑자기 민형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이민형입니다.”

  “저거 열심히 만들면 뭐라도 주나? 보아하니 만드는 건 어렵지 않은 것 같은데 왠지 노예처럼 쉴 시간도 안 주고 부려 먹을 것 같단 말이야. 밥이나 제대로 주려나 모르겠네.”


  기원의 말에 민형은 다시 앞을 보았다.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신문지 헬멧의 사진이 나와 있었다. 신문지 반죽으로 만든 회색 헬멧 위에 홈이 격자무늬로 패어 있고, 팬 홈을 따라 노끈을 두르면 끝이었다. 다른 사진 속에서는 신문지 헬멧을 쓴 남자가 웃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남자는 눈은 웃지 않고 입만 웃고 있었다.


  신문지 헬멧을 만드는 방법도 순서대로 나와 있었다. 방법은 너무나 간단했다.    

       

1. 신문지들을 통에 넣은 뒤 물을 넣어 곤죽으로 만든다

2. 곤죽에 첨가물과 색소를 넣어 단단하게 굳힌다

3. 홈이 팬 특수 프레임을 곤죽에 집어넣어 헬멧을 찍어 낸다.

4. 찍어 낸 헬멧들을 잘 말린다

5. 잘 마른 헬멧 위에 있는 홈 위에 노끈을 단다 

         

  이 정도의 공정이라면 초등학생이라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만드는 방법이 이렇게 간단하다면 그만큼 헬멧을 빠른 시간 안에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 된다. 지금 트럭에서 내린 아무개들은 스무 명도 되지 않았다. 그중에는 아이와 노인도 있었다. 


  “곧 일꾼들이 더 올 거야. 헬멧은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할 테니 오늘은 일단 교실로 가서 쉬도록. 여자들은 1학년 1반, 남자들은 1학년 2반. 교실에 가서 책상과 의자들부터 교실 뒤로 다 밀면 침낭을 하나씩 지급할 거다.”

  날카로운 남자가 말했다.


  민형은 기원과 함께 1학년 2반 교실로 향했다. 아이도 기원의 옆에 붙어서 따라왔다.

  “아들입니까?”

  “가족과도 같은 아이요.”

  민형의 질문에 기원은 짧게 대답했다. 아이를 배려하는 말이었다. 민형은 아이가 있는 곳에서 그 질문을 한 것을 곧 후회했다. 자신은 지나치게 배려가 없었다. 자신의 아이와 굴에 있는 사람들도 아이와의 관계를 물어보면 기원처럼 대답해 줄까? 만약 그렇다면 조금이나마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민형의 뒤로 남자 몇 명이 뒤따라왔다.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아무개의 삶은 그르쳤으니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굴도 사라지고 세상에 얼굴이 드러난 이상 살아가는 의미가 거의 사라진 셈이었다. 구제금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었다. 한 탕이 없어진 자리에는 하루살이의 삶이 남았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밥이라도 잘 주면 좋겠군. 돈은 바라지도 않아. 줄 것 같지도 않고.”

  “밥 잘 먹고 잘 짖고, 진짜 개가 따로 없네.”

  “여기에 갇혀 있다면 여기도 굴이나 다름없지. 그래도 이젠 갈 데가 없으니 일단 빌붙어 있어야지.”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민형은 눈을 감았다.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뜨니 오른쪽에서 이상한 기운이 느껴졌다. 창문이 있는 쪽이었다.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블랙 헤일이 내리고 있었다. 민형을 여기까지 오게 한 장본인이었다. 검은색 덩어리는 속절없이 빛났고 하염없이 예뻤다.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과 삶을 깎고, 삼키고, 조각냈는지를 알지 못하므로 블랙 헤일은 오로지 아름답게 존재했다.


  문득 블랙 헤일이 내리는 운동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헬멧 없이, 맨머리로.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지만 한번 그렇게 생각하자 반복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하늘은 어두웠다. 시계가 없어서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건물 안에 있을 때만 하늘을 마음껏 바라볼 수 있었다. 


  운동장에 트럭 한 대가 새로 들어왔다. 검은색 승용차도 들어왔다. 승용차 안에서 단단한 헬멧을 쓴 사람들이 내렸다. 블랙 헤일 때문에 트럭에 있는 새 아무개들은 곧바로 내리지 못했다. 이곳에서 가장 먼저 만든 신문지 헬멧은 아무개들에게 보급될 것이다. 헬멧을 만드는 자가 다치면 안 됐으므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손에 쥐게 된 게 신문지 헬멧이 된 셈이었다. 기껏해야 몇 번 못 쓰고 망가질, 사실은 일회용으로 써야 할 연약한 헬멧뿐이었다. 


  민형은 자신도 모르게 창문 쪽으로 틀었던 몸을 다시 교실 쪽으로 돌렸다. 교실 안에서는 먼저 들어간 남자들이 책상과 의자들을 교실 뒤로 밀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청소하기 위해 방과 후에 책상과 의자들을 저렇게 밀곤 했었다. 단지 바닥에 있는 먼지들만 감당하면 되었을 그 시절이 그리워졌다. 헬멧을 만드는 일이 간단해 보여 이곳에서 감당할 일의 무게도 그보다 많이 무겁지는 않을 것 같았다. 민형은 사뿐한 걸음으로 교실 안에 들어갔다. 



이전 18화 장편 소설 <아무는 개> (1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