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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Sep 03. 2024

장편 소설 <아무는 개>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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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집을 나온 유희는 문 앞에 떨어진 블랙 헤일들을 보았다. 총 네 개였다. 블랙 헤일들을 집었다. 모서리를 쓸어 보았다. 굴 밖에서 쓰러졌을 때 자신을 구해 주었던 동민이 떠올랐다. 블랙 헤일의 몸통을 어루만졌다. 거칠거칠했다.


  그 순간 예리한 통증이 가슴을 갈랐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더 정확히는 혼자 살기 싫고 선희와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느꼈던 위통과는 달랐다. 새롭게 솟아난 감정이 만들어 낸 통증이었다. 분노. 유희는 입 밖으로 이 단어를 소리 내어서 발음해 보았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발음해 보니 더 묵직했다. 주운 블랙 헤일들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청소부들이 벌써 거리로 나와 블랙 헤일들을 자루에 담기 시작했다. 유희 또래처럼 보이거나 유희보다 조금 더 나이가 있어 보이는 앳된 얼굴들도 많이 보였다.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이 어디예요?”

  유희는 중국집 근처에 쌓인 블랙 헤일들을 치우기 위해 다가오는 청소부를 보며 물었다. 눈이 큰 남자아이였다.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였다. 남자아이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약도를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유희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한 군데만, 딱 병원 한 군데만 들러 보고 선희에게 가자고.      




  붉은 헬멧을 쓴 조강을 보고도 동민은 아무 말이 없었다. 굴로 오다가 블랙 헤일을 맞았는데도 헬멧은 멀쩡했다. 편의점에서 파는 것치고는 튼튼한 것 같았다. 조강과 똑같은 헬멧을 쓴 유우는 조강의 옆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이제 아는 척도 안 하는 거야?”

  조강은 웃으면서 비닐봉지를 내려놓았다. 

  “어머, 웬 음식이 이렇게나 많아요?”
   봉지 안을 들여다본 선희가 상기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동안 제가 너무 야박하게 사 온 것 같아서 다 같이 드시라고 넉넉하게 사 왔어요. 어려울 때일수록 서로 돕고 살아야죠.”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어디 멀리 가는 사람처럼. 어디 아파?”

  남 노인의 말에 조강이 입으로만 웃었다.

  “할머니도 참. 제가 갈 데가 어디 있어요? 동민 씨랑 행복하게 살아야죠.”

  “저번에 싸우고 나서 정신 차렸나 보네. 연기는 아닌 것 같은데.”

  조강이 이번에는 이를 드러내며 시원하게 웃었다.


  유우 2세는 어느새 봉지에서 과자를 꺼내 유우에게 봉지를 뜯어 달라고 조르고 있었다. 바나나 맛이 나는 과자였다. 유우는 봉지를 뜯어 과자를 유우 2세의 입에 물려 주었다. 유우 2세는 좋아서 소리까지 지르며 과자를 먹었다. 순식간에 바나나 향이 굴 안에 달콤하게 퍼졌다. 유우 2세는 양손에 과자를 두 개씩 쥐고 먹었다. 바나나도, 바나나 맛 과자도 실컷 사 주지 못하는 게 미안했다. 


  동민이 시선을 유우 2세에게 두면서 조강에게 물었다. 

  “뉴스에서는 우리에 대해 뭐라고 해?”
   “아니, 무슨 헬멧이 모자란답시고 굴들을 다 뒤져서 데려가 보급형 헬멧을 만들게 시킨다는 거야. 공장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어디인지는 말하지도 않아.”

  “보급형요?”

  “뭐, 신문지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얼마나 튼튼할지는 모르겠어요.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그럼 혹시 민형 씨도…….”

  “그럴 수도 있죠. 중요한 건 여기도 안전하지 않다는 거예요. 전국적으로 동시에 수색을 시작했다고 하니까 여기도 들키는 건 시간문제죠.”

  “들키면…….”

  “이 생활은 쫑 나는 거고, 구제금도 그대로 쫑!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거죠. 아니, 아무것도 없는 무로 돌아간다고 해야 하나. 완전 털리는 거예요.”

  “조강 씨는 남 일처럼 말하네요. 동민 씨가 실패하면 조강 씨도 실패하는 거 아닌가요?”


  선희의 말에 조강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면서 구석에 있는 책더미에 눈길을 주었다. 

  “……자기는 아직도 소설 써?”
   조강은 선희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동민에게 물었다.

  “가끔. 여기에서는 할 일이 없잖아. 남는 건 시간뿐이고.”

  “그 소설에 나도 등장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만약 등장시킨다면 좋은 쪽으로 해 줘. 악역은 싫어.”


  조강은 책을 구경하면서 동민에게서 등을 돌렸다. 동민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강은 동민을 보지 않았다. 맨 위에 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호주머니에 있던 것을 꺼내 책 중간에 끼워 넣었다. 그 모습은 아무도 보지 못했다. 비닐봉지 쪽으로 걸어가 그 안에서 페트병에 담긴 이온 음료를 꺼냈다. 페트병 뚜껑을 열었다. 구석에 있던 종이컵에 음료수를 한 잔 따라 마셨다.


  그 뒤에 동민에게 물었다.

  “아직도 밤에 잠이 안 와?”

  “응, 햇빛을 잘 못 봐 그런지 잠이 잘 안 오네. 운동도 안 해서 그런가…….”

  “……수면제 좋은 거로 가져왔어. 잠 안 올 때 먹어.”

  조강이 동민에게 약병을 내밀었다. 동민은 약병을 받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조금만 더 참아. 카미긴이 눈앞에 있어.”


  카미긴은 필리핀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섬이었다. 모양이 수시로 바뀌는 모래섬인 화이트 아일랜드가 있는 곳. 세부 아래쪽에 있는 보홀섬에서 다시 아래로 내려가야 카미긴이 나왔다. 세부에서 19인승 경비행기를 통해 카미긴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생을 고요하게 보내기에 좋을 것 같았다. 온천과 냉천을 번갈아 가며 하고, 오토바이를 타며 해안도로를 종일 달리고 싶었다. 실종 선고를 받고 나면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무조건 해외로 떠나야 했다.


  “카미긴? 카미긴이 어디예요?”
   “필리핀에 있는 섬이야. 우리의 꿈이지.”

  선희의 말에 조강이 대답했다. 그 뒤에 가볍게 묵례하고 헬멧을 쓴 채 굴을 나갔다. 조강이 굴을 나갈 때까지도 동민은 조강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


  “……아직도 화가 안 풀린 거예요?”

  유우가 물었다. 동민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럼요?”

  “어쩐지, 아내를 보는 게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아서 그래요.”

  “왜 그렇게 불길한 소리를 해요?”


  “아내의 눈빛이 다른 날과 달랐어요. 나를…… 똑바로 봤어요. 다른 때는 아무리 화가 나고 짜증 나도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않았는데. 나한테 조금이라도 미안함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런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더라구요. 이제 나한테 미안하지 않은 걸까요? 아니면 미안할 일을 이제 안 만들겠다는 걸까요?”

  “지금이라도 가서 붙잡고 물어보지 그래요?”
   “……소설 얘기 물어본 것도 처음이에요. 이제까지 내가 소설을 쓰든 말든 관심조차 없었는데. 진짜 어디로 떠나려는 건지…….”

  “동민 씨!”

  “떠나려고 작정했으면 붙잡아도 소용없을 거예요.”

  “조강 씨가 떠나면 동민 씨가 여기 있었던 것도 물거품이 되고, 여기에 있을 이유도 없잖아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일단 한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해야겠어요.”


  동민은 조강이 주고 간 약병에서 수면제 한 알을 꺼내 물도 없이 삼켰다. 그 뒤에 굴 쪽을 보고 돌아누웠다. 유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민의 등이 너무 쓸쓸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등도 울고 있는 것 같았다. 등까지 울고 있을 때 어설픈 위로는 안 하는 것보다 못했다. 저절로 눅어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굴에서는 기다림이 기본값이었다.


  “최후의 만찬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음식은 많이 남겨 놓고 갔구먼. 기성이도 안 와서 쫄쫄 굶나 싶었는데 맛있게 먹자고.”

  남 노인이 연어 통조림을 집어 들며 말했다. 


  “오늘이 며칠이죠?”

  선희가 혼잣말처럼 물었다. 유우는 구석에 두었던 달력을 보았다. 일력이라 오늘이 며칠인지 쉽게 알 수 있었다. 유우가 굴에 들어오기로 결정했을 때 민형이 선물로 준 것이다. 민형은 달력을 주면서 지나간 날들을 손으로 느껴 보라고 했다. 그러면 시간을 좀 더 쉽게 견딜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처음에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일력을 뜯었는데 어느새 시들해졌다. 루틴이 필요없는 장소이기는 했다. 며칠 분을 한꺼번에 뜯을 때가 많았다.


  “4월 21일.”

  오늘도 날짜가 새로 바뀌었는데도 달력을 넘기지 않았다. 유우는 달력을 다음 장으로 넘기려고 했다. 유우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다른 날과는 달력의 촉감이 달랐다. 한 겹이면서 두 겹이고, 두 겹이면서 한 겹인 듯한 이질감이 손끝에 느껴졌다. 휴지통에 새로운 쓰레기봉투를 갈아 끼울 때, 맨 윗부분을 문질러 틈을 벌리는 것처럼 종이를 문질러 보았다. 입구가 벌어진 쓰레기봉투처럼 종이가 두 쪽으로 갈라졌다. 달력 뒤에 종이 한 장이 풀로 붙어 있었다. 풀로 붙인 종이를 떼어 보았다. 풀이 발린 종이에 민형의 단정한 글씨체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이 날짜가 될 때까지 내가 굴에 오지 않으면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니 무조건 굴 밖으로 나올 것.

     

  눈앞이 아찔해졌다. 유우는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유우 2세를 자신의 품에 끌어당긴 뒤 꼭 안았다. 유우 2세는 발버둥도 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과자를 깨물어 먹었다. 아삭, 소리가 조용한 굴 안에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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