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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Sep 03. 2024

장편 소설 <아무는 개>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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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굴에 차려진 식탁은 성대했다. 식탁이라고 해 봤자 동민의 책들을 가득 담았던 종이상자가 전부였다. 와인에 피자, 통닭구이, 크림빵, 바게트, 감바스, 푸팟퐁 커리, 연어 샐러드까지 좁은 종이상자 위가 가득 찼다. 유우나 남 노인이나 선희도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 보지 못했던 음식들이 대부분이었다. 감바스나 푸팟퐁 커리는 이름도 처음 들어 보았다. 조강이 준 수면제가 효과가 좋아서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겠다고, 수면제만 사서 오겠다고 했던 동민이 양손에 포장된 음식을 가득 들고 들어왔던 것이다.


  “세상에, 이게 다 뭐예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들이 많네.”

  “저도 사실 처음 먹어 봐요. 이번 기회에 같이 먹어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동민이 쑥스러운 듯 웃었다. 그 웃음에 어쩐지 그늘이 져 있었다. 수면제를 먹었는데도 잠을 푹 자지 못한 것 같았다. 

  “음식들이 다 비싸 보이는데…… 어떻게 샀어요?”

  “아내가 선물로 돈을 줬어요. 좋은 일이 생겼나 봐요.”


  “우와, 완전 잘됐네요!”
   선희가 기뻐하며 말했다. 눈이 빛나고 있었다. 이때만큼은 기침하지 않았다. 오랜 기침 때문에 야윈 선희의 볼이 움푹 팼다. 유우 2세도 먹지도 못하는 음식들을 보며 침을 흘렸다. 유우가 유우 2세의 턱에서 떨어지려는 침을 손으로 받았다.


  남 노인은 와인 병을 들어 보며 말했다. 

  “막걸리나 사 오지, 이 주스 같은 술이 뭐가 맛있다고 그렇게 다들 찾는지 모르겠네. 비싸기만 하고. 배도 채우고 든든하고 값도 싼 막걸리가 최고야.”

  “할머니도 참, 이 음식들에는 막걸리보다 와인이 어울린다구요. 이번 기회에 와인 한번 드셔 보세요.”


  선희가 피자 한 조각을 집어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오는 동안 좀 식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통조림에 길든 배에 오랜만에 다른 음식이 들어가자 속이 찌르르했다. 동민이 와인 병을 돌려 땄다. 구석에서 종이컵 네 개를 꺼내 와인을 한 잔씩 따랐다. 그리고 와인이 담긴 컵을 유우와 선희, 남 노인에게 나누어 주었다.


  유우는 크림빵을 집었다. 동그란 크림빵의 귀퉁이를 조금 뜯어 유우 2세의 입에 넣어 주었다. 유우 2세는 입을 오물거리면서 빵을 맛있게 먹었다. 유우도 크림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생크림 케이크 맛이 났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가장 최근에 먹었던 케이크의 맛을 크림빵의 맛과 겹쳐 보려고 애썼다. 누군가가 태어난 날이거나, 새로운 것을 시작하거나, 중요한 날을 잊지 않기 위해 먹었던 케이크의 맛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오늘은 그 어느 날도 아니었다. 그 반대에 가까웠다. 내일 아침에 민형을 찾기 위해 굴을 나가야 했다. 그렇다면 이건 민형이 사라진 날, 끝난 것을 시작하는 날, 아무개에서 해방되는 중요한 날을 잊어버리기 위해 먹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뭔가…… 진짜 최후의 만찬 같네요.”

  피자를 다 먹어 치운 뒤 감바스에 있던 새우를 꺼내 바게트 위에 올려 먹던 선희가 갑자기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동민이 놀라서 물었다. 선희가 새우와 바게트를 씹으면서 대답했다. 

  “유우 언니 내일 아침에 여기에서 나간대요. 남편 찾으러 간다고…….”

  유우는 민형이 달력에 남기고 간 비밀 메시지를 동민에게 보여 주었다. 동민은 그 메시지를 소리 내어 읽었다. 

  “이 날짜가 될 때까지 내가 굴에 오지 않으면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니 무조건 굴 밖으로 나올 것…….” 

  “분명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지금까지 연락도 없고 여기에도 안 온 걸 보면…….”

  동민은 종이컵에 남아 있던 와인을 훌쩍 마신 뒤 말했다.

  “여기에서 나가지 않는 편이 좋을 겁니다. 그게 오히려 남편을 빨리 만나는 지름길일 수도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전에 제 아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무개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헬멧 만드는 일을 시킨다구요. 민형 씨도 그곳에 있을 가능성이 제일 커요. 지금 밖에서는 아무개들의 서식지들을 수색하고 있어요. 여기도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겠지요. 차라리 여기에서 기다리다가 그곳에 가면 민형 씨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여? 빨리 탈출해야지! 기성이도 못 보고 잡혀갈 수는 없어.”

  남 노인이 소리를 질렀다. 선희도 이어서 말했다.

  “유희도 언제 올지 모르는데 다른 데 가면 연락할 방법이 없어요.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지켜야지.”

  “지킨다구요?”

  “이제 여기가 내 집이야. 함부로 나갈 수는 없어.”

  “어떻게 지켜요? 저희는 이렇게 약한데…….”


  남 노인이 구석을 가리켰다. 구석에는 조금씩 모아 놓은 블랙 헤일들이 있었다. 

  “그래 봤자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우박 덩어리일 뿐이잖아요.“

  선희의 말에 유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지요.”


  유우는 와인을 조금씩 마셨다. 목구멍으로 와인이 한 모금씩 넘어갈수록 목구멍에 차 있던 울음이 눈물로 솟아 나왔다. 유우의 눈에서 눈물이 한 가닥씩, 하지만 양쪽으로 번갈아 가며 끊임없이 내렸다. 민형이 보고 싶었다. 자신의 실종 신고를 해 주어야 할 사람이 사라졌다. 민형이 자신보다 먼저 실종되다니 믿기지 않았다. 민형과 자신을 구하기에 손 하나로 쥘 수 있는 블랙 헤일은 연약해 보였다. 


  “괜찮아요. 꼭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선희가 유우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새삼 마른 어깨였다. 둥근 곡선마저 무너져 어깨뼈가 산처럼 솟아 있었다. 그동안 통조림만 먹어서 그런 것 같았다. 당분은 넘치도록 먹었을지 모르지만 영양가는 없었다. 남 노인은 말없이 통닭구이를 손으로 집어 먹었다. 날개를 입에 한꺼번에 집어넣은 뒤 기가 막히게 뼈만 손바닥에 뱉어 냈다. 엄청난 발골 실력이었다. 남 노인의 입술에 기름이 묻어 나왔다. 동민은 눈을 내리깔았다. 음식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그동안 햇빛을 받지 못해 유난히 더 희어진 피부가 창백해 보였다. 와인만 연거푸 들이켰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남은 와인은 병째 마셨다. 동민이 따라 준 것을 빼고 와인을 더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음식도 결국 다 먹지 못하고 남겼다. 선희와 유우는 남은 음식들을 봉지에 잘 넣었다. 선희는 입맛을 다셨다. 오늘 먹었던 음식의 맛을 내내 기억하고 싶었다. 배부르기 싫었다. 내일 아침에도 일어나자마자 먹을 생각이었다. 잘 때도 이 음식들의 맛을 되새김질하며 잠들 생각이었다.


  와인을 마셨더니 눈꺼풀이 금방 내려앉았다. 유우는 술을 마신 김에 계속 눈물을 흘렸다. 자리에 누워서도 유우의 눈꼬리에는 눈물이 계속 매달려 있었다. 유우 2세도 엄마가 우는 것을 보자 울먹거렸다. 남 노인이 유우 2세의 엉덩이를 토닥였다. 유우 2세는 금방 울음을 그치고 웃으며 잠들었다.


  동민은 모두 잠든 뒤에도 자지 않고 오랫동안 책을 뒤적였다. 집이 경매로 넘어가 마지막으로 정든 집과 가구들을 쓸어 보는 것처럼 책을 오래 쓸기도 했다. 구석에 손전등을 켜 놓았는데도 굴은 여전히 낮이 밤 같았고 밤은 더욱 밤 같았다.     




  민형은 아무개들이 만든 헬멧들이 트럭에 실려 나가는 것을 오랫동안 쳐다보았다. 밥 먹는 시간과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시간을 헬멧을 만드는 데에만 썼다. 조금 답답하긴 했어도 생각보다는 평화로웠다. 그동안 아무개들도 끊임없이 와서 일하는 사람들만 백 명이 넘었다. 이제는 정말 공장 같았다. 만드는 헬멧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대신 튼튼한 정도는 갈수록 떨어졌다. 단순한 작업을 반복하다 보니 열심히 만들기는 어려웠다. 원본인 친환경 헬멧과 비교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저 헬멧을 흉내 낸 헬멧 비슷한 것만 기계적으로, 열심히 만들었다.


  두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건 오랜만이었다. 가족들과 같이 산다면 아이에게 많은 것들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손으로 만지고 주무르고 쓸어 볼 수 있는 인형 같은 것들. 딱딱하고 단단해 보이는 헬멧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추위에 떨던 속을 달래 주던 수프처럼 낫낫한 것들만 주고 싶었다. 아쉽게도 체육관에는 부드러운 것들을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없었다.


  민형은 주머니에서 빵 조각을 꺼냈다. 아침 식사 때 배급받은 모닝 빵을 반만 먹고 반은 남겨서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다. 계속 딱딱한 것만 만지다 보니 마음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것을 만지고 싶었다. 빵 조각을 만지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졌다. 아직 보지 못한 아이의 볼을 만진다면 부드럽겠지. 그동안 고생했다면서 유우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유우라는 이름은 새삼 부드러웠다.     


  헬멧들이 한 차례 실려 나가자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건물 밖으로 나가는 것은 금지였다. 아무도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모두 교실에 펴 놓은 침낭에 들어가 단 낮잠을 잤다. 민형은 달랐다. 이제 헬멧들도 웬만큼 만들었으니 나가도 될 것 같았다. 때가 되었다.


  “낮잠 안 잘 텐가?”
   기원이 물었지만 민형은 고개를 저었다. 민형의 얼굴에는 단호한 빛이 서려 있었다. 그 표정을 본 기원은 입술을 달싹거렸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마지막 인사라도 하려는 듯 민형의 눈을 오래 쳐다보다가 침낭 속에 몸을 들이밀었다. 


  민형은 복도에 선 채 반만 남은 빵 조각을 다시 반으로 잘랐다. 각각의 조각들에 물을 약간 뭉쳐서 동그랗게 만들었다. 동그랗게 만든 조각들을 서로 이어 붙여 세로로 세웠다. 눈사람 모양이 되었다. 올겨울에는 유우와, 그리고 아이와 함께 눈사람을 만들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좋았다. 유우와 유우 2세가 없으니 바다도, 여기도 굴이었다. 


  눈사람을 손바닥에 세운 민형은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박 형사였다. 이곳에 온 뒤 박 형사를 처음 보았다.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팔을 들어 올려 눈사람을 더 높이 세웠다. 박 형사는 눈사람을 보지 못하겠지만. 민형은 속으로 말했다. 저는 돌아갈 겁니다. 눈사람을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을 계속 흔들었다. 박 형사가 자신을 볼 때까지 계속 흔들 생각이었다.


  계속 손을 흔들자 박 형사가 드디어 민형을 보았다. 들리지 않았던 인사가 드디어 보였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박 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나갈 시간이었다. 나가도 될 것 같았다. 박 형사의 허락이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


  민형은 빵으로 만든 눈사람을 주머니에 넣었다. 바닥에 미리 놓아두었던 헬멧을 집어 들었다. 민형의 몫으로 받은 신문지 헬멧이었다. 헬멧의 위력을 믿어야 했다.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헬멧을 높이 쳐든 뒤 있는 힘껏 던졌다. 


  챙! 


  헬멧이 창문을 깨고 운동장으로 날아갔다. 포물선으로 날아가는 헬멧을 운동장을 지키고 있던 경찰과 군인들이 멍하니 쳐다보았다. 태어나서 비행기를 처음 본 이들처럼. 헬멧을 따라 여러 시선이 움직였다. 그사이에 민형은 깨진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놀이기구를 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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