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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Sep 24. 2024

기지 (1)




일시적인 래그. 모든 것은 잠 때문이었다.  

    

    


. 33.3 33.3 33.3     



가을잠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은 오후 여섯 시였다. 내일 오전 열한 시부터 열릴 국제학술대회를 앞두고 사라졌다. 워싱턴대학교에서 연구자들의 감정을 연구하고 있는 젊은 학자 보니스가 발표자로 온다고 해서 더 중요한 자리였다. 보니스는 연구자들의 ‘마음챙김’을 위한 강의와 워크숍인 ‘마음의 재난 대응 매뉴얼 및 행동 지침’으로 유명해진 학자였다. 그 자리에서 ‘(     ) 감정연구소’도 보니스의 발표 뒤에 붙어 연구 결과를 발표하기로 되어 있었다. 가을잠도 물론 참석해야만 했다.


가을잠은 (     ) 감정연구소에서 돌보던 숲까지 데리고 사라졌다. 숲은 오래된 연구소 생활이라는 극한의 환경이 연구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험하기 위해 연구소에서 키우고 있던 책이었다. 한마디로 책이 연구소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실험하는 거였다. 책이라고 해 봤자 정식으로 출판된 건 아니었고 가을잠이 석사 과정일 때 썼던 세미나 발제문을 모아서 미니 제본기로 직접 만든 제본이었다. 발제문들에서 스테이플러 심을 호랑이발톱으로 제거하고 구멍을 뚫어 스프링을 끼운 터라 제본의 윗면과 옆면은 너덜너덜했다. 너무 없어 보이는데. 실험 대상을 보자마자 원서와 표지까지 똑같이 만들어 주는 복삿집 제본에 중독되어 있던 봄잠이 투덜거렸다. 이게 우리야. 실험 대상을 제공한 가을잠이 말했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만든 제본과 함께 가을잠도 사라진 것이다.


네 명의 연구원인 봄잠, 여름잠, 가을잠, 겨울잠이 이십사 시간을 네 부분으로 나누어 숲을 여섯 시간씩 돌보았다. 봄잠은 새벽 다섯 시부터 오전 열한 시까지, 여름잠은 오전 열한 시부터 오후 다섯 시까지, 가을잠은 오후 다섯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겨울잠은 밤 열한 시부터 새벽 다섯 시까지. 각자 가장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고려한 전형적이면서도 공평한 배분이었다. 물론 그 시간에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잠을 자지 말라는 뜻이었다. 연구소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잠이므로 잠이라는 말이라도 실컷 불러 보자고 연구자명의 돌림자를 잠으로 만들었지만 언어의 주술성은 없었다.


숲을 돌보지 않은 시간 외에는 부족한 생활비를 메우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다. 인건비로는 한 달의 반도 인간답게 살기 어려웠다. 당번일 때에는 미세먼지를 먹은 책의 종이가 변하지는 않았는지, 글자가 눈물로 번지지는 않았는지, 낡은 스프링이 빠지지는 않았는지 실시간으로 관찰하고 일지를 썼다. ‘유의미한 변화’가 없어도 ‘변화 없음’이라는 말로 채웠다. 일 년이 다 되어 가는 실험 기간 동안 일지만 열 권이 넘어갔다. 그게 연구소 존재의 근거였으니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공평하게 사 분의 일씩 책임을 할당했는데. 가을잠은 책임할당제를 무시하고 무책임하게 증발해 버렸다. 심장이 쪼그라들었다. 학회에서 보니스는 연구소 생활이 연구자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발표할 것이다. (     ) 감정연구소에서는 그 발표에 곁들여 연구소에서 키우고 있는 숲을 실시간 영상으로 공개하기로 했다. 규모가 큰 국제학술대회인 만큼 학회의 반응이 내년 사업을 따낼 수 있을지 없을지에 영향을 미칠 터였다. 잠들의 연구가 트렌디한가, 생각해 보면 논문의 인용 지수부터 처참했다. 그런 데다 가을잠이 제일 중요한 실적을 가져가 버렸으니 내년엔 연구소가 없어질지도 몰랐다.


(     ) 감정연구소는 기숙사로 가는 길을 지나 언덕 위에 있었다. 기숙사 창고를 임시로 쓰고 있었다. 호수 없이 간판만 겨우 달았다. 주소를 말해 줄 때가 가장 난감했다. 기숙사 옆의 기지처럼 생긴 곳이라고 전화로 한 번 더 설명해야 했다. 말만 연구소지 컨테이너나 다름없었다. 누가 위에서 망치로 내리친 것처럼 양쪽 윗면의 가장자리가 우그러져 있어 약간 둥글게 보이기도 했다. 멀리서 보면 회색 이글루 같았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곳이었다. 실적을 더 쌓아서 사회과학대학 건물 안에 방 하나를 얻는 게 목표였다.


그때까지는 견디고 버텨야 했다. 당번인 시간을 빼면 대부분 연구소에 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일단 지나치게 건조했다. 창문으로 빛이 들어올 때마다 먼지가 커튼처럼 펼쳐졌다. 미니 가습기를 틀고 미스트를 뿌려도 봄잠은 기침을 했다. 기관지염이 기관지 천식으로까지 번지고 있었다. 기침의 강도가 깊어질수록 봄잠의 예민도도 높아졌다. 여름잠은 냉장고에 캐러멜이 잔뜩 뿌려진 편의점 푸딩만 있으면 대체로 만족했다. 겨울잠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종이를 찢는 습관이 있었다. 종이가 자동으로 갈리는 대형 파쇄기를 사고 싶었지만 연구소에는 손잡이를 잡고 돌리는 미니 파쇄기밖에 없었다. 기둥과 머리가 분리되는 둥근 분홍색 손잡이는 머리가 수시로 떨어져 나가 머리를 찾아다니는 일이 많았다. 가을잠은 유일하게 이곳을 좋아했다. 최대한 안락하지 않은 것이 실험 환경에 더 적합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열 평 남짓 하는 연구소에 들어서면 테이블 위에 있는 투명 상자가 가장 먼저 보였다. 숲의 집이었다.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지금은 비어 있었다. 상자 옆에는 쓰다 만 일지가 놓여 있었다. 삼 면을 차지하고 있던 책장에는 실험 대상에 영향을 줄까 봐 책을 대부분 치워 버려서 정식 출간을 거치지 않은 보고서들과 자료집들만 있었다. 이론서들은 상자에 넣어 벽 한 면에 줄지어 늘어선 책상 밑에 넣어 두었다. 여름잠은 오후 여섯 시까지 일지를 벤 채 엎드려 잠들었다. 가을잠이 언제 들어왔는지는 몰랐다. 창문들은 열려 있었다. 창문을 덮고 있던, 원래는 베이지색이었으나 이제는 회색빛에 가까운 커튼이 나부꼈다. 고요한 가운데 여름잠의 나직한 숨소리만 들려 그 광경만 보면 평화로웠다. 


아, 망했다. 당번 교체 안 하고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봄잠이 짜증스럽게 묻자 여름잠이 대답했다.

계속 잘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당이 떨어져서…….

야, 율! 또 냉장고에 있는 푸딩 다 처먹고 잠들었어? 푸딩 그만 먹으라고 했지?


봄잠이 화가 나 여름잠의 이름을 불렀다. 봄잠과 여름잠은 선과 율이라는 이름을 지닌 쌍둥이였다. 삼 초 차이로 태어나 삼 초 차이도 없이 연구자의 길에 들어온 것을 내내 후회하는 중이었다. 겨울잠은 늘 나서서 계획을 이야기했던 가을잠 대신 봄잠과 여름잠을 달래며 말했다.


시간이 없어. 빨리 수습하자. 한 명 빠졌으니 우리 세 명이 공평하게 책임을 나누자. 33.3씩.

뭐부터 해야 하지? 숲을 보여 줄 수는 없으니 말로라도 때워야 할 것 같은데. 가을잠이 발표하기로 한 부분은 어떻게 할까?

대신 읽으면 되잖아. 그때 회의하고 나서 가을잠이 정리했던 것 같은데 원고가 어디 있지?

일주일 전이 발표 원고 마감일이었으니 보낸편지함에 있지 않을까?

아닐걸. 우리는 학회장에서 발표하는 게 아니라서 원고 따로 안 보냈어.

컴퓨터에는 회의록이 저장되어 있지 않을까?


여름잠이 푸딩을 십 초 만에 먹어 치우는 속도로 컴퓨터를 켰다. 연구소에 유일하게 있는 컴퓨터는 이십 년도 더 된 거였다. 라벨에 적혀 있는 연도의 앞자리가 일이었다. 부팅만 오 분 넘게 걸렸다. 포털 시스템이 다운될 때마다 정보통신처의 원격 지원을 받으면서, 포맷해야 한다는 경고를 열 번 넘게 무시한 게 후회되었다. 겨우 뜬 컴퓨터의 바탕화면에는 그동안 보냈던 공문들과 엑셀 파일만 가득했다. 발표 원고로 보이는 건 없었다. 대신 녹음 파일이 하나 떠 있었다. 파일 제목은 ‘뼈’였다. 발표 연습한 건가 봐. 겨울잠이 중얼거리면서 녹음 파일을 클릭했다. 평소에 들었던 씩씩한 목소리가 더 강해진 가을잠의 목소리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보니스 교수님, 아니 김본 선배. 저는 선배를 보면서 제가 밟을 수 없는 세계에 관해 생각했어요. 선배는 언제나 저보다 앞서나가는 느낌이었고 저는…… 늘 저만의 기지에서 붕 떠 있는 기분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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