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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Sep 24. 2024

기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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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스가 한국에 도착해 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학회를 준비하는 실무자와 연락하여 리허설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보니스는 저녁 여섯 시에 김포공항에 도착한다고 했다. 김포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찾은 뒤 택시를 타고 명동에 있는 호텔에 도착하기까지 한 시간 삼십 분, 체크인하고 방에 가 짐을 풀고 준비하기까지 삼십 분. 리허설을 여덟 시쯤에 한다고 생각하면 두 시간 정도 남았다. 모든 능력치를 최대로 끌어올려야 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체크리스트로 만들었다. 겨울잠이 굴러다니던 이면지에 체크리스트 초안을 썼다.


     

□ 리허설 때 우리의 상황과 감정을 말하면서 시간 끌기

□ 리허설 때 사업 개요 설명으로 시간 끌기

□ 리허설 때 숲 대신 일지만 추려서 보여 주기

□ 그동안 연구소에서 가을잠의 흔적 뒤지기

□ 가을잠에게 계속 연락 시도하기

□ 이도 저도 안 되면 미친 척하고 춤이라도 추기     



아니, 마지막 항목은 너무 뜬금없는데?

봄잠의 말에 여름잠이 대답했다. 

이거, 제연이가 힘들 때마다 한 말이었어. 재즈 댄스 잘 추잖아.


그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제연이 재즈 댄스를 추는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팔과 다리를 한껏 뻗고 가슴을 절도 있게 튕긴 뒤 머리부터 허리까지 이어지는 웨이브로 마무리하면 모두가 제연만 주목해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벌써부터 도피하는 건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하나씩, 차근차근. 근근이 이어지는 연구소였지만 이번에는 화산이 폭발하는 정도의 충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보니스야말로 연구소의 이름과도, 연구와도 어울리는 존재였으며 동아줄이었다. 가을잠이 없어도 발표를 성공적으로 해야 했다. 체크리스트를 천천히 고칠 시간이 없었다. 왜 연구소에는 일하는 방법만 나온 매뉴얼만 있고 사고가 터졌을 때 수습하는 매뉴얼은 없는지.


그때, 연구소의 전화가 울렸다. 보통은 전화벨이 두 번 울리기 전에 받았지만 이번에는 아무도 전화기 쪽으로 튀어가지 않았다. 연구소에는 전화기가 세 대나 있었지만 제대로 작동되는 것은 컴퓨터가 있는 책상에 놓인 전화뿐이었다. 여름잠이 끌리는 걸음으로 전화기 쪽에 다가갔다. 수화기를 들려고 한 순간 전화가 끊어졌다. 곧바로 봄잠의 휴대폰이 울렸다. 액정에 학회 실무자의 전화번호가 떠 있었다. 비상연락망을 조사할 때 휴대폰 번호를 괜히 알려 줬다고 생각한 봄잠이 짜증스럽게 통화 버튼을 누른 뒤 스피커폰으로 바꾸었다.


여보세요, 감정연구소죠? 이 중요한 때에 왜 연구소에 아무도 안 계시는 건가요?

수화기 너머로 학회 실무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네, (     ) 감정연구소입니다. 리허설 준비 때문에 정신없어서 전화를 바로 못 받았어요.

다행이네요. 두 시간 뒤에 리허설인 거 아시죠? 보니스 교수님과 화상 회의 프로그램으로 연결할 거예요. 그때 내일 발표에서 할 일들을 하시면 돼요. 합을 맞추는 거죠. 제가 예전에 대표자분께 보니스 교수님 발표에 관해 설명드렸었는데…… 대표자분이 누군지 생각이 안 나요. 어떤 분이시죠? 


저예요. 저예요. 저예요.

……네? 

겨울잠이 봄잠과 여름잠에게 눈짓했다.

이미철입니다.

미첼요?

아니요, 미철요. 아름다울 미, 밝을 철.


아아, 예. 근데 진짜 리허설 잘하셔야 해요. 보니스 교수님 엄청 꼼꼼하시더라구요. 글쎄, 당장 내일이 학회라 이미 자료집 원고도 인쇄소에 다 넘기고 인쇄 들어가던 차에 오타 하나 고쳐 달라고 난리 치는 거예요. 비행기 안에서까지 발표문을 고쳤다는 거죠. 완벽주의도 그런 완벽주의가 없는데 실무자는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죠. 이건 뭐, 보니스 정도의 학자가 발표하는데 발표문을 별지로 할 수도 없고……. 다행히 아직 제본까지는 안 들어간 상태라 인쇄소에 사정사정하고 완전 욕 먹으면서 오타 나온 페이지만 따로 인쇄해서 제본해 주기로 했는데 진짜 학회 전날이지만 도망가고 싶었다니까요. 시간 맞추는 게 제일 중요한데 행사 망치면 다 제 책임이잖아요. 이럴 땐 진짜 책임 나눌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책임을 책임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맞아요, 김본 선배 완벽주의자예요. 진짜 학회 망치면 안 되죠. 저희한테도 엄청 중요해요, 이 행사.

그럼요, 그럼요! 진짜 무사히 잘 끝났으면 좋겠어요. 그럼 미리 세팅해 주세요. 그 뭐지? 수프? 숲? 연구소에서 키운다던 그 책도 꼭 보여 주시구요. 그게 그 연구소의 특화된 점이니까. 아, 그리고 제가 정신없어서 여러분들 명패를 따로 준비 못 했어요. 연구소에서 자체적으로 준비 부탁드릴게요. 명패 없으면 목걸이 명찰 같은 거라도 괜찮아요. 미리 말씀 못 드려서 죄송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시간이 없으니 리허설 준비부터 빨리 할게요.

네, 잘 부탁드릴게요. 아, 잠시만요. 네? 보니스 교수님이 생각보다 일찍 도착할 것 같다구요? 여보세요, 리허설을 좀 앞당겨야 할 것 같아요. 전화 끊자마자 바로 준비 부탁드릴게요오오오오…….


학회 실무자가 마지막 말을 폭죽을 당기듯 터뜨리고는 휴대폰에서 사라졌다. 연구소에는 한동안 한숨 소리만 울렸다. 아무것도 시작한 게 없는데 벌써 행사가 다 끝난 것 같았다. 겨울잠이 머리를 감쌌다. 앉는 부분이 망가져서 덜렁거리는 의자 때문에 고개를 잠깐만 숙여도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크게 났다.


……잠깐 쉴까? 머리를 맑게 해야겠어.

푸딩이라도 하나씩 먹자. 딱 오 분만 쉬고 정신 차리고 그다음부터 하나씩 차근차근하는 거야.

푸딩 먹으면서 아이돌 직캠 딱 하나만 보자. 심폐소생술이 필요해.


겨울잠과 여름잠과 봄잠이 이어달리기처럼 바통 터치를 했다. 여름잠이 냉장고에서 캐러멜 푸딩 세 개를 꺼냈다. 겨울잠이 유튜브에 들어가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돌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외쳤다. 아, 그러고 보니 가을잠이 유튜브 시작했다고 하지 않았어? 숲에 관해서 일지로 쓰지만 말고 유튜브로 보여 주자고 하면서 채널 개설했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채널 이름이…….

일지에 써 놓았던 것 같은데.

아, 맞아! 일지 한번 뒤져 봐야겠다.


봄잠이 투명 상자 옆에 있던 일지들을 뒤적거렸다. 여름잠이 푸딩을 각자의 앞에 하나씩 놓으면서 말했다. 그동안 난 명패 만들고 있을게. 서랍 어딘가에 빈 명패가 있었던 것 같은데……. 가을잠 이름을 넣어야 할까? 봄잠이 일지를 넘기면서 대답했다. 절대 안 돼. 무임승차잖아. 그래도 지금까지는 함께했었는걸. 그래, 무대에 오르기 위해 춤을 함께 연습했어. 하지만 공연 당일 무대에 오르지 못했어. 탈락한 거야, 이 무대에서. 겨울잠은 말없이 무임승차자가 없는 아이돌의 영상을 틀었다. 봄잠이 푸딩을 한 스푼 떠먹으며 창문을 바라보았다. 몇 달째 닦지 않았던 창문에는 먼지가 솜털처럼 앉아 있었다. 불을 켜 두었지만 형광등 하나가 나가 연구소는 낮인데도 어두웠다. 형광등 보수 신청해야겠는걸. 봄잠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여기까지 보수를 오나? 겨울잠이 이어서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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