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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Sep 24. 2024

기지 (4)



Ⅳ. 33.3 33.3 33.3     




유튜브 채널 이름에 잠이 들어갔던 것 같아.

바로 우리네.

그러고 보니 가을잠이 왜 사라졌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네. 어떤 게 힘들었을까? 


봄잠과 여름잠과 겨울잠은 처음으로 (     ) 감정연구소에서 함께 밤을 지새웠다. 테이블 위에 신문지를 깔고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겨울잠이 탄 커피로 입가심을 했다. 보니스의 발표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았다. 숲에 관해 썼던 일지들도 모조리 읽었다. 수많은 ‘변화 없음’들의 기록들 중에서 튀는 것들을 찾았다. 여름잠이 율동을 하는 듯한 목소리로 그 부분을 읽었다. 마음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 같은데 포기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의 귀퉁이로 옮겨 갔기 때문이다. 보니스의 발표문은 팔 년 전 세미나에서 김본 선배가 제연을 칭찬했던 아이디어를 담고 있었다. 그 아이디어가 적혀 있던 발제문이 바로 숲이었다. 가을잠이 들고 가 버린 바로 그 숲 말이다.


그래서 가을잠이 사라진 거구나.

완벽하게 짐작하긴 어렵겠지만.

겨울잠의 말에 봄잠이 대답했다. 여름잠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때늦은 가을비이자 때 이른 겨울비였다. 빗물이 창문의 먼지를 조금씩 씻어 냈다. 당분간 청소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어쩌면 앞으로도 내내. 밤이 깊어 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더 이상 할 일은 없어 보였다. 냉장고에 있던 푸딩들도 다 먹었다. 연구소에 남아 있던 활자들도 다 읽어 치웠다. 겨울잠이 책장 앞에 놓여 있던 낡은 복사기와 녹음기와 모니터와 팩스를 번쩍 들어 구석에 쌓아 두었다. 발을 디딜 곳이 조금 더 생겼다. 흩어져 있던 이면지들도 따로 모아 두었다. 거의 시든 화분에 물을 주었다. 연구소가 조금 넓어졌다. 오랜만에 머리와 근육을 동시에 쓰니 졸음이 몰려왔다.


이제 밀린 잠을 자자.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고.


겨울잠이 말했다. 봄잠과 여름잠과 겨울잠은 테이블 위에 나란히 누웠다. 다리가 테이블 밖으로 삐져나왔다. 네모난 방석을 반으로 접어 베개로 삼았다. 무릎 담요를 세로로 펼쳐 다리를 최대한 덮었다. 이렇게 있으니까 우리가 꼭 숲 같다. 여름잠이 중얼거렸다. 숲이나 다름없지. 누워 있는 숲. 봄잠이 대답했다. 겨울잠이 연구소에 남아 있는 마지막 형광등을 껐다. 밤 열한 시였다. 학회 때까지는 딱 열두 시간 남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불을 껐는데도 연구소는 완벽하게 어두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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