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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혜린 Sep 24. 2024

기지 (5)



Ⅴ. 25 25 25 25     




이제 곧 보니스의 발표가 시작될 거예요. 준비되셨죠?


학회 실무자의 전화가 오자마자 노트북으로 화상 회의 프로그램에 접속했다. 온라인에서 비디오를 통해 보는 보니스의 얼굴에는 여전히 은은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걱정 없이 잠을 푹 자고 호텔 조식까지 천천히 시간을 들여 말끔히 먹어 치운 듯한 얼굴이었다. 안녕하세요. 발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보니스의 목소리에 다른 목소리가 겹쳐졌다. 학회장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여름잠이 휴대폰으로 틀어 놓은 유튜브 방송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가을잠의 얼굴이 보였다. 가을잠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을잠의 등 뒤로 뭉게구름이 그려진 포스터가 보였다. 가을잠의 방에 걸려 있는 거였다. 팔 년 전에 마지막 세미나를 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가을잠이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오늘 아침, 가을잠의 유튜브 채널 이름을 드디어 찾았다. ‘누운 잠’. 가을잠은 그 속에 있었다. 여름잠이 휴대폰을 보니스가 나오는 화면 쪽으로 돌렸다. 보니스와 가을잠이 마주 보게 된 셈이었다. 보니스의 등 뒤에 있던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제연의 얼굴이 떴다. 그 주위를 선과 율과 미철이 둘러싸고 있었다. 어머, 리허설 때 잘해 놓고 왜 갑자기…… 저분은 누구죠? 영상 너머로 당황스러워하는 학회 실무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봄잠에게 학회 실무자의 전화가 걸려 왔지만 봄잠은 받지 않았다.


발표 계속해 주세요. 학회 사회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니스가 헛기침을 한 번 한 뒤 발표문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발표하는 것은 정말 오랜만입니다. 이곳에서 저를 기억하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보니스입니다. 가을잠도 방송 멘트를 하기 시작했다. 김본 선배, 오랜만이네요. 이제연 기억하죠? 선배가 아이디어 좋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면서 사적인 세미나 때에도 조심해야 한다고. 이럴 때 아이디어 많이 훔쳐 가니까 녹음하거나 메모할 때도 다른 색으로 표시하거나 이름 쓰거나 해서 구분해 놓으라고.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제 아이디어가 어느새 선배 쪽으로 자연스럽게 옮겨 갔네요.


보니스가 말을 잠깐 멈췄다. 고개를 들고 정면을 보았다. 자신의 휴대폰 속에 있는 제연의 얼굴을 본 듯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목소리는 화면 중앙이 아니라 가장자리에서 났다. 보니스가 다시 발표문을 읽기 시작했다. 저희 연구소에서 키우던 수프는 연구자들의 감정 상태를 반영한 척도로서 기능하며…… 가을잠도 방송을 이어 갔다. 저희 연구소에서 키우던 숲은 연구자들의 상태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척도입니다. 유튜브 방송은 보니스의 발표와 함께 갔다. 때로는 주고받는 것 같기도 했다. 듀엣처럼.


그때, 학회 실무자가 외쳤다. 보니스 교수님, 어디 가세요? 그 목소리를 따라, 발표자를 찍던 카메라가 학회장의 문 쪽을 비추었다. 김본이 허리를 숙인 채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보니스는 여전히 화면 속에 있었다. 학회 사회자가 느릿하게 말했다. 보니스 교수님의 컨디션이 안 좋으셔서…… 사실은 오늘 급하게 AI 발표로 대체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발표를 이어 가겠습니다.


겨울잠이 휴대폰을 노트북 쪽으로 더 가까이 가져갔다. 화면에는 이제 봄잠과 여름잠과 겨울잠의 얼굴이 뜨지 않았다. 보니스가 말을 더듬더듬 이어 갔다. 마음을 챙기지 못하는 마음 재난의 실제 상황을 보여 주는 사례를 실시간으로 보시겠습니다. 보니스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가져갔던 숲을 가을잠이 한 장씩 뜯기 시작했다. 뜯어낸 숲을 공중으로 뿌렸다. 종이들이 춤을 추면서 사방에 퍼졌다. 그 춤을 본 보니스의 눈에서 빛이 점차 사라졌다. 청중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봄잠에게 학회 실무자의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봄잠이 전화를 받은 뒤 말했다. 리허설은 리허설일 뿐이죠. 실전은 리허설이 아니에요. 봄잠은 전화를 받는 내내 팔짱을 풀지 않았다.


보니스는 말을 더 많이 더듬었다. 빨랐던 말이 느려졌다. 점점 멈추어 가고 있었다. 결국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결론도 못 읽고 본문도 삼분의 일 정도가 남아 있었다. 보니스가 화면에서 사라졌다. 지금 상황에 관한 책임도 실무자가 질 것을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어쩔 수 없었다. 여름잠이 화상 회의 프로그램에서 나가기 버튼을 눌렀다. 가을잠도 방송을 끝냈다. 화면에서 모든 잠이 사라졌다. 연구소에는 갈 곳을 잃은 먼지들이 떠다녔다.


진짜, 완전히 망했네.


여름잠이 노트북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창문에 고여 있던 묵은 먼지들을 마저 씻어 냈다. 여름잠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은 뒤 기지개를 켰다. 우두둑. 뼈가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겨울잠도 여름잠을 따라서 기지개를 켰다. 그 뒤에 의자에 앉았다. 망가진 의자에서 앉는 부분이 기어이 떨어져 나갔다. 원반처럼 날아간 의자의 파편을 본 봄잠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름잠과 겨울잠도 따라서 웃었다. 가을잠도 왠지 방 안에서 혼자 웃고 있을 것 같았다.


눈물까지 흘리며 한참 웃던 봄잠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 체크리스트가 남았어.

우리도 아직 남아 있고.

봄잠의 말에 이어 여름잠이 중얼거렸다. 겨울잠이 체크리스트에 체크를 했다.   

  

∨ 이도 저도 안 되면 미친 척하고 춤이라도 추기    

 

한동안 실험에서 새로운 변수는 하나도 없고 딱히 할 일도 없을 때, 가을잠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할 게 없으면 춤이라도 춰야지. 


가을잠의 춤이 보고 싶었다. 봄잠과 여름잠은 입구 쪽에 있던 캐비닛에서 망가진 우산들을 덜어 냈다. 덜어 내고 남은 비닐우산 세 개를 챙겼다. 봄잠과 여름잠과 겨울잠은 (     ) 감정연구소를 빠져나왔다.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가늘어졌다. 셋은 언덕을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쨌든, 클리어.


겨울잠은 마지막으로 달려가면서 뒤를 보았다. 기지의 윤곽이 서서히 사라져 가는 것이 보였다. 투명한 기지는 무책임하게 아름다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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