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얕은 관계, 5월의 걷기

by 해센스

오래 쉬다가 다시 걷기 모임을 찾았다. 가장 좋아하는 친구, 그리고 불편하지 않은 사람들과 그냥 서울을 걷는다.


눈앞의 풍경이 발걸음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바뀐다. 너무 뜨겁지도 그렇다고 차갑지도 않은 따스한 햇살, 분무기처럼 흩뿌리던 비가 멈춘 후의 수분기 머금은 선선한 바람이 피부와 와닿는다. 딱 5월 중순에, 그것도 비 내린 다음에야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햇살과 청명하고 청정한 공기를 누려본다.


이런 순간에만 진짜로 행복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스친다. ‘나 행복한가? 그래. 이렇게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고, 무탈한 일상이 지속돼서 행복해. ‘라며 생각으로 명명하는 행복이 아닌, 순간에 느끼는 단순하고 가벼운 행복감. 운동화와 편안한 옷가지, 혼자 집 밖에 나갈 작은 의지만 있으면 되는 가성비 좋은 행복이라고 해야 하나.


책을 읽을 때만 진짜 나로 존재하는 것이 괜찮다고 느끼기도 했는데, 책에만 몰입해 있는 나 자신이 한편으로 불편하기도 했다. 이미 아는 내용, 비슷한 생각과 가치관을 복습하고 강화하기 위해 마침 그런 책들을 골라 어쩌면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는 느낌. 나를 둘러싼 주변에 동화되고 싶지 않고, 수없이 재생산된 철 지난 지식 뽐내기와 충분히 사적이지 않아 친밀해지는데 도움이 안 되는 이야기에 기를 뺏기고 싶지 않은데, 그러면서 책이든 유튜브든 낯익지만 듣고 싶은 이야기에는 몰입해 있는 모순.


이 두 부류의 불편함, 일정 수준의 타인혐오와 자기혐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간, 그리고 방법이 모임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대화가 오가지만, 대화가 주는 아닌 그런 모임이면 더 편안하다.


의무가 없고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나 자신이 될 수 있는 느슨한 소속감이 있는 관계. 나를 향한 어떤 말도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관계. 그중에서 마음 맞으면 가까워질 수 있지만 오직 취향과 성향이 맞아서 지속하는 관계의 편안함.


우연히 시절을 나눠 가까워졌던 인연들은 대부분 소원해졌지만, 이렇게 취향과 성향이 맞아 가까워진 사람들은 따로도 종종 만나며 근황을 공유한다. 더 좋은 것은 그렇게 만날 때마다 겉으로, 그리고 속으로 서로가 걷는 길을 칭찬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왕이면 서로의 일면을 마치 나 자신처럼 애정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이롭다.


굳이 애써 더 가까워지지 않는 관계는 그것대로 좋다. 일면식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상에서 자주 마주하는 사람들보다 더 반갑게 인사를 건네고, 소소한 정보를 나눈다. 얼마 전 숙면에 좋다는 액상마그네슘을 건네받아 먹어보고 밤잠에 도움을 받고는, 직접 주문해 매일 밤 쭉 짜 먹으며 긴 밤의 예민함을 덜어내는 중이다. 얼마 전 간 걷기 모임에서는 전시회를 추천받아 사전 등록을 하기도 했다.


매일 보는 사람만 보면 얻을 수 없는 정보와 영감을 책과 유튜브 밖에서 사람을 직접 대면해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가까운 사람에게 받는 상처를 느슨한 관계의 사람에게 치유받기도 한다. 특별히 깊은 대화를 나누지 않고, 도심 속 자연을 걷는 것이 좋아서 걷고 있는데 내 옆의 누군가도 함께 걷고 있다는 데서 오는 치유이다. 애인과 헤어져도, 그냥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 걸으면 그렇게 끔찍할 정도로 괴롭지는 않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경조사를 잊지 않고 오가고 희로애락을 나누는 친구야말로 진짜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특별한 날들을 위해 일상을 희생하기보다는, 일상의 하루하루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은 내게는 일상의 권태와 우울을 지워주는 느슨한 관계가 그 못지않게 가치 있다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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