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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녕 Sep 03. 2021

거북선과 고등어

아빠, 당신의 이야기

장례를 치르는 동안 가족들은 크게 세 번을 운다고 한다. 돌아가셨을 때, 염습의 과정을 마치고 입관할 때, 그리고 화장을 시작(혹은 하관 할 때)할 때. 난 아빠를 보러 가는 택시 안에서 가장 크게 울었고, 소생실에서 죽어버린 아빠 곁에 놓여있던 등산 가방을 열었을 때 많이 울었다. 그런데 사실 어느 때라고 떠올릴 필요도 없이 난 장례를 치르는 삼일 내내 거의 쉬지 않고 울었는데, 그 때문이었는지 장례가 끝나고 한동안은 사물이 잘 보이지 않아 애를 먹었다.

빈소를 차린 지 이틀째 되는 날 저녁 호주에서 언니가 도착한 탓에 우리는 아빠의 입관과 발인을 세 번째 날 아침에 연이어서 했다. 편안한 얼굴로 늘 내 곁에서 내 의사결정을 성심성의껏 돕던 장례지도사님은 입관할 때 염을 하는 모습부터 다 지켜볼지 아니면 수의를 입은 후의 모습부터 볼 지 나에게 선택하도록 했다. 나는 조금이라도 아빠를 더 오래 보고 싶었고, 언니도 아빠를 못 본 지 1년이 넘은 터라. 처음부터 모두 함께 보겠다고 했다.

약품 냄새가 진동하는 염습실은 썰렁하고 차가웠다. 유리 안으로 보이는 공간 안에 장례지도사와 다른 한 분이 더 서 있었다. 두 분은 우리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한 뒤 염을 시작했다. 다른 한 분은 연한 노란색 장갑을 끼고 있었으나 내 나이 또래였던 여자 장례지도사 분의 손은 맨손이었다. 내 손을 늘 꼬옥 잡아주던 그 두 손으로 중간중간 아빠의 얼굴과 머리칼을 공손하게 메만져주셨다.

염습의 과정을 마친 후 아빠와 마지막으로 인사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파랗게 온기를 잃은 아빠의 얼굴은 대학병원 소생실에서 봤을 때보다 편안해 보였다. 소생실에서 봤을 땐 틀니를 뺀 아빠의 입이 기괴할 정도로 안으로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염습실에서 본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아빠가 틀니를 꼈던 사람이라는 것도 알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다. 나중에서야 염을 하는 분들이 고인의 얼굴 근육을 펴 편안한 인상을 만들어주시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알았다.

아빠. 둘째 낳으면 키워준다고 하더니. 진짜 다섯 살 될 때까지 잘 키워줘서 고마워. 그리고 아빠 이야기 진득하니 끝까지 늘 안 들어서 미안해. 잘 가 아빠.

아빠 얼굴을 붙잡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면도기에 인중이 베여 난 상처를 꽤 오래전부터 보았던 것 같은데, 그 상처가 아직도 선명했다. 그리고 오래오래 주의 깊게 본 적 없던 아빠의 주름진 얼굴. 늘 저녁 밥상에 앉아서도 두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느라 아빠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생전 안아보지 못한 품. 왜 난 아빠를 한 번도 꼭 껴안아 본 적이 없었을까.

탁탁.

아버지 편안하게 보내드려.

내 등을 두드린 건 이모부였다. 아빠 품에 고개 숙여 내내 떨며 울고 있던 나를 현실로 쑥 건져 올려낸 것은. 그렇지, 아빠 잘 보내줘야지. 내가 이렇게 붙잡고 있으면 안 되지. 세상에서 내가 제일 슬프다고 끝까지 울어도 되는 건 아니지.

아빠를 보내면서 가장 두려웠던 건 내가 살고 있는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이었다. 매일 저녁 시간을 함께 보내던 공간. 냉장고에는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아빠가 직접 만들어 넣어 놓은 콩나물, 시금치 반찬이. 나 감기 나으라고 사다 준 쌍화탕이. 오징어 뭇국을 끓여먹자고 사다 놓은 무우가 그대로 있을 것이었다. 냉동실에는 아이들과 하나씩 녹여 구워먹으라고 손질해 둔 자반고등어가, 밥에 넣어 밤밥을 해 먹으라고 손수 까 얼려둔 알밤이 그대로 있을 것이었다.

가장 끝 방의 소파 위에는 늘 아빠의 네모난 회색 가방이 놓여있었다. 아빠는 그 가방 안에서 오는 길 못골 시장에서 산 떡이며 귤이며 당근을 늘 꺼내 식탁 위에 올려두었었다. "난 중국 세척 당근 안 먹어."라고 내가 말하면 아빠는 혼자 웃으며 도로 그걸 가방 안에 집어넣곤 했었다.

첫째의 자전거 목에는 나일론 밧줄이 묶여있었다. 둘째를 어린이집에서 먼저 찾아와 형아의 자전거를 태워 밖으로 나가는 날, 다리가 짧아 페달을 밟지 못하는 둘째를 위해 아빠가 메 둔 것이었다. 그 줄을 끌고 아빠는 둘째와 아파트 단지를 돌았다. 첫째가 내리는 태권도 차를 저녁 6시에 정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노라면 저 멀리서 둘째를 태운 노오란 자전거를 끌고 오는 아빠가 보였다.

거실의 팬트리 장 문짝에는 아빠가 크레파스로 갱지 이면지 뒤에 그린 거북선이 붙어있었다. 아인이가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를 신나게 부를 때, 할아버지는 이순신이 탄 거북선이 이거다. 하며 교자상 앞에 앉아 한참 종이에 색을 칠했다. 그 이후로 아인이가 좋아하는 타노스 주먹도 그려주고, 태극기도 그려주고. 그려달란 것은 뭐든지 그려주었다. 자꾸 아인이에게 한글을 가르치려고 하기에, '괜히 애쓰지 말고 아빠 잘하는 거 해. 그림 그려주면 되잖아.' 말했더니 그 이후로 집에 오면 그림이 늘어있었다.

집 안 곳곳에 아빠가 살던 흔적들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것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아빠가 누워 꾸벅꾸벅 졸던 의자가. 아빠가 볶아 빻아놓은 깨가. 아인이의 선물로 사 들고 왔던 빨간색 로보트가. 집에 오자마자 찬장에서 꺼내 뜨거운 물을 붓고 우려내던 녹차 티백이. 모두 그 자리를 지키고 여전히 있을 것이었다.

다 그 자리에 있는데 아빠만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저녁시간 아이 신발을 벗기다 무심코 '아빠'를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부르고는 이제 내가 감각하는 세상에는 내 아빠가 없음을 알았다. 세상에 아빠라고 부를 사람이 없다는 게 이렇게 서러운 일일 거라고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텅 빈 집 안에서 혼자 거실에 앉아 한 달 전 그러던 것처럼, 아빠 아빠 아빠. 하고 불러봤다. 옆 방에서 아빠가 왜에- 하고 설설 걸어 나올 것만 같았다.

오직 이 세상에서 나만 기억하는 그 모든 풍경을, 잊을까 겁이 난다. 유일하게 나와 그 기억을 공유하고 있는 두 아이의 기억에서 할아버지가 아주 사라져 버릴까 봐. 그 수없던 저녁 시간들이 나만 알고 있는 것이 되어버릴까 두렵다. 기억을 붙잡아 놓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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