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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리 Nov 22. 2020

2.2 영화, 보기만 하는 줄 알았지?

영화 뽕 뽑아 보고 듣기

내가 초등학생이던 80년대 후반 - 90년대 초반은 비디오가 대중화된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다.

텔레비전 채널은 공중파, 볼 수 있는 외국 방송 채널은 AFKN이 전부였던 시절이다.

공중파에서 방송해 주는 외국 영화나 드라마는 모두 더빙 처리되어 있었다.


우리 집에는 캐나다에서 사 온 디즈니 만화 영화 비디오테이프가 몇 개 있었고, 그 뒤에도 아빠는 해외 출장을 다녀오는 지인들에게 부탁해 영어 비디오테이프를 종종 집에 가져왔다.

하지만 그렇게 소장할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는 많지 않았고, 나와 언니의 콘텐츠 소비력을 충족시키기엔 충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막 생겨나기 시작한 비디오 대여점에서 빌려 보여 주자니 자막이 있어 영어 공부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 아빠는 묘안을 냈다.


바로 휴지와 박스 테이프였다.

아빠는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비디오를 빌려다 주었고, 대신 한국어 자막은 보지 않도록 휴지나 두꺼운 박스 테이프로 화면 아래 자막 부분을 가렸다.

영어로 된 만화 영화나 영화를 보고 싶으면 불편하지만 자막은 포기하고 봐야만 했다.


아빠의 창의적인 학습 촉진법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언니가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넘어가던 즈음 국내에도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던 언니는 ‘워크맨’으로 열심히 음악을 들었는데, ‘워크맨’을 따라 갖고 싶어 했던 내게 아빠는 색다른 제안을 했다.

출장 다녀오시며 워크맨을 사 올 테니 대신 가요 테이프와 함께 영어 테이프를 들으라는 제안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각각 다니던 나와 언니는 취향에 따라 좋아하는 영화가 있었고, 소장하고 있는 비디오가 많지 않다 보니 좋아하는 그 영화들만 주야장천 보고 또 보곤 했다.

아빠는 비디오와 녹음이 되는 오디오를 연결해서 비디오에서 나오는 음향 만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테이프를 워크맨으로 듣고 또 들었다. 그렇게 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영화는 <늑대개 (White Fang)>(1991)와 <흐르는 강물처럼 (The river runs through it)>(1992)이다. 두 영화 모두 내레이션이 있는 영화고 음악도 영화 내용도 잔잔하게 좋은 영화다. 이런 영화들을 음악처럼 매일 같이 흘려듣기 하면서 나도 모르는 새 영어를 듣는 귀가 많이 발달했다.


영화를 소리만 듣거나, 자막 없이 보다 보면 당연히 잘 안 들리는 부분이 있다.

그건 모르는 단어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처음 듣는 표현 때문일 수도 있다.

보통 영화를 한 번 보면 배우들의 연기나 분위기, 맥락에 의지해서 대충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영화를 듣기만 하면 시각적인 혜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못 알아듣는 것으로 끝난다. 그래서 오히려 더 집중해서 듣거나 반복해서 듣고 끝까지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좋아하는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했던 나만의 두 가지 연습이 있었다.

하나는 소리만 듣고 모르는 단어의 철자를 추론해 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것이었다.


영화 속에서 배우가 편하게 연기하며 빨리 말하면, 모르는 단어는 더욱더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는다. 이때 문장을 소리 나는 대로 통째로 외워 따라 하면서 특히 안 들리는 단어를 여러 번 반복해서 소리 내 본다.

여러 번 반복해 보면서 그 단어의 철자를 가늠해 보는 것이다.


소리만 듣고 영어 단어 철자를 맞게 조합해서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다.

소리 나는 대로 쓰면 대부분의 경우 철자에 문제가 없는 한국어와 다르게, 영어는 같은 모음과 자음이라 하더라도 다양하게 다른 소리가 나기 때문에 소리만 들어서는 정확한 철자를 알 수 없는 단어가 많다.

그런데 모르는 단어를 소리만 듣고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며 사전을 찾다 보면 그 단어가 등장한 상황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어떤 이야기를 하던 중에 이 단어가 나왔을까?

상황 상 이 단어가 어떤 의미 여야 말이 될까?

이렇게 문맥, 상황을 총동원해서 단어를 추론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학습적인 측면만 고려한다면 정말 효율이 떨어지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 끝에 찾아내어 알게 된 단어는 절대 잊지 못한다.

의미만이 아니라 철자와 소리, 그리고 그 단어가 등장한 문화적 콘텍스트까지 모두 완전히 내 것이 된다.


문장을 통째로 외우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도움이 된다.

다양한 상황과 맥락에서 등장하는 문장을 통째로 외우면 상황이 될 때 꼭 나도 써보고 싶어 진다.


수년 전 미드를 보던 중 주인공이 “I’ll give you a heads-up.”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보고는, 너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바쁘게 돌아가는 회사 생활에서 동료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따라 해 보고 싶기도 했다. 이런 생각에 자연스레 이 표현을 외우고, 써먹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다 내가 직접 말했을 때의 희열이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 표현을 쓴 순간만은 내가 드라마 주인공이 된 것만 같은 짜릿한 기분이었다.



이렇게 영화 한 편도 나와 언니에게는 본전 뽑는 영어 공부의 매체였다.

보는 것만도 지겨울 때까지 반복해서 보고, 녹음된 소리도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가짓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너무 좋아하는 영화이기 때문에 그런 반복이 가능하기도 했다.


만약 나의 부모님이 공부에 도움되지 않는 흥미 위주 영화이니 그만 보고 영어 문법 문제를 더 풀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장담 하지만, 그렇게 문법 공부를 하고 문제를 풀면서 익혔을 내용보다 몇 배는 더 많은 내용을 나는 영화를 보면서 학습했을 것이다. 그것도 너무 재미있게. 스스로, 알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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