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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Vet May 18. 2019

400년이 지나도 매력적인 미치광이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예술에 관한 또다른 담론.

※브런치 무비패스로 관람한 후기입니다※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1~3문단은 스포일러와 무관합니다)


▲ <몬티 파이튼의 성배> 스틸컷

 이 영화를 보기 직전, '테리 길리엄'이란 다섯 글자에 무지했던 필자는 <몬티 파이튼의 성배>를 챙겨 봤다. 영화를 보고 (긍정적인) 충격을 받아 개봉 연도를 확인했다. 1975년 영화였다. 2075년이라 해도 믿을 만한 코미디의 향연에 상당히 아득해졌는데, 개봉 연도를 확인한 후의 감흥은 경이로움의 수준에 이르렀다. 기대치가 이렇게 잔뜩 높아진 상태에서 관람한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또 다른 경이를 보여주었다.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스틸컷 ⓒ(주)NK콘텐츠

 개략적인 감상부터 남겨보자면, 유쾌하면서도 날카로운 블랙 코미디의 향연이다. 돈키호테 원작의 간략한 줄거리와 몇몇 유명한 사건, 소재들만 알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이다. 각각의 캐릭터가 전부 인상적이고 매력적이지만, 동시에 적절한 비중 배분을 통해 효율적인 감정 이입을 돕는다. 특히 아담 드라이버와 조나단 프라이스는 이번 영화에서 주옥같은 명연기를 펼친다. 또 난민 문제 등 정치적으로 상당히 민감한 부분을 거리낌 없이 다루면서도 불편하지 않게 만드는 감독의 탁월한 유머 솜씨가 빛난다. 특히 현실과 판타지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여러 인물들을 유려하게 엮어내는 연출과 각본에 아낌없이 찬사를 보낸다.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스틸컷 ⓒ(주)NK콘텐츠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화의 서사 구조이다. 정리되지 않은 서사 때문에 우리는 결코 이 영화를 '깔끔한 완성도'를 지닌 영화라고 말할 수 없다. 하나 이 영화는 애초에 정석을 추구하지 않는다. 영화의 서사는 철저히 주인공 '토비'의 의식에 의존한다, 의식의 흐름 기법 수준으로. 카메라는 항상 토비를 따라다니며 토비의 시점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조명한다. 또 단순 사건들만 주인공을 따라 조명하는 것이 아닌, 회상 혹은 환상 장면 또한 토비의 의식을 따라 등장한다. 그렇다면 토비의 의식을 통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스틸컷 ⓒ(주)NK콘텐츠

 133분이라는 꽤 긴 러닝타임답게, 생각보다 영화가 시사하는 지점들의 폭도 넓고, 깊이도 깊다. 그중 이 글에서 다루고 싶은 것은 '예술'에 관한 담론이다. 주인공인 '토비'는 영화감독이다. 토비는 학창 시절 만들었던 영화에서 돈키호테 역을 맡았던 할아버지 '하비에르'를 마주친다. 하비에르는 자신이 돈키호테라고 굳건히 믿고 있고, 토비를 자신의 조수 '산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토비가 하비에르에게 끌려 떠나는 모험이 영화의 주된 서사이다(이 글에서 '돈키호테'라는 표현과 '하비에르'라는 표현은 구분 지어 사용하겠다).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스틸컷 ⓒ(주)NK콘텐츠

 모험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창작자인 토비와, 창작물인 돈키호테가 동행하는 여정이라는 점이다. 토비가 말하길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찍을 당시에 돈키호테의 결말을 바꿨고, 촬영지 주민들을 배우로 기용하는 등 여러 도전을 했다고 한다. 지금 돈키호테가 돼 버린 '하비에르'는 토비가 기용하기 전까진 마을의 구두장이에 지나지 않았던 인물이지만, 토비에 의해 돈키호테로 재탄생한다. 즉 토비의 창작물인 셈이다. 또 촬영했던 마을의 이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촬영했던 마을의 이름은 'los sueños'인데, 'sueños'가 '기분 좋은 꿈'이란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영화를 찍던 시절은 좀 더 순수한 과거이고, 기분 좋은 꿈과 같음을 암시하는 부분이다(첫사랑처럼 묘사되는 '안젤리카'와도 밀접하다).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스틸컷 ⓒ(주)NK콘텐츠

 둘의 여정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시퀀스가 있다. 거대한 성의 주인 '알렉세이'는 쾌락을 좇는 부류의 인간이다. 그는 성주간(고난주간)에 자신 소유의 고성에서 성대한 가장회를 연다. 그는 '진짜 같은' 쇼를 보고 싶어 하며, 그의 앞에 돈키호테가 나타나자 그는 광고 제작자를 시켜 쇼를 기획한다. 이 시퀀스는 '실제 같은 예술'을 향한 시도를 보여주는데,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실제 추구하는 행위가 이뤄지는 곳은 과거를 가장한 이고, 가짜 사람들(가장회)로 가득 차 있다. 또 그 행위로 인해 유일 실제 예술 '돈키호테'는 결국 그 시퀀스를 거쳐 허구의 돈키호테로 가장한 '하비에르'로 회귀한다, 아니 추락한다. 빛나는 영웅에서 잊힌 노인으로.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스틸컷 ⓒ(주)NK콘텐츠

 하비에르와 반대로, 토비는 점점 미쳐가며 자신이 새로운 창작물이 되어간다. 안젤리카를 향한 순정에 의한 각종 환상을 보게 되고, 열심히 지니고 다녔던 스페인 금화는 사실 별 볼일 없는 금속 부품들이었다. 또 직장 상사의 아내인 '재키'는 토비를 성적으로 유혹하며 '난 상사의 아내야'라는 말을 계속 반복하는데, 상당히 이질적이고 몽환적으로 연출한다는 점에서 이것부터 토비의 환상이 아닐까 추측한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가 실현되는 지점이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의 창작자인 토비는, 결국 자신의 착각으로 하비에르를 죽인다, 아니 자신을 구하러 온 기사 '돈키호테'를 죽인다.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스틸컷 ⓒ(주)NK콘텐츠

 결국 토비는 그 자신 스스로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라는 예술이 된다. 하지만 이 예술은 불완전하다. 죽기 직전 돈키호테는 자신이 하비에르임을 자각하고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토비가 치명적인 타격을 줬을 때는 돈키호테였지만, 죽는 시점에서는 하비에르였다. 즉 토비가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라는 예술이 됐음에도, 불완전한 상태라고 말하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스틸컷 ⓒ(주)NK콘텐츠

 하비에르가 죽은 후, 마지막에 토비와 안젤리카는 쓸쓸히 떠난다. 그 과정 중 토비는 가짜 산초에서 '진짜 돈키호테'로 거듭난다. 지금까지 다른 돈키호테들이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할 때는 '풍차'의 모습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토비의 시점에서 '진짜 거인'의 환상이 비친다. 거인과의 전투에서 쓰러지고, 안젤리카가 와서 토비를 깨워보지만 토비는 안젤리카를 본 후 "산초...?"라는 말을 남긴 후 기절한다. 안젤리카가 계속 깨워보지만 일어나지 않다가 "저 산초예요...!"라고 말하는 순간 토비가, 아니 돈키호테가 반응한다. 지금 그는 토비로서 그토록 찾아 헤맨 옛사랑 '안젤리카'가 아니라, 돈키호테로서 충직한 종복 '산초 판사'가 필요한 것이다. 결국 창작자가 스스로를 창작물로 만들면서 이 서사시는 막을 내린다.


▲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스틸컷 ⓒ(주)NK콘텐츠

 사실 앞서 말한 것처럼 이 영화는 얘깃거리가 너무나도 풍부하다. 영화 전반에 깔려있는 정치적 이슈, 테리 길리엄 감독 특유의 유머 센스, 안젤리카 캐릭터 집중 탐구, 촬영 기법 디테일, 원작과의 구체적인 비교 등등등...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흥미로운 영화라 가급적이면 N차 관람을 추천한다. 사실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는 테리 길리엄 감독에겐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1989년부터 구상한 프로젝트이지만, 중간에 배우가 죽고 제작에 차질이 생겨 몇 번을 중단하고 재개했던 작품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겨우 개봉한 탓인지, 영화 시작과 동시에 나타나는 크레딧에 'making... unmaking.. and making again...' 이런 식의 자학 개그까지 등장한다(상당히 짠하다). 이런 역경 가운데서도 돈키호테 원작이 갖고 있는 매력을 살리면서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테리 길리엄 감독에게 찬사를 보내는 바이다. 이번 글의 주제와 가장 관련 있다고 생각하는 극 중 대화로 글을 마무리한다.


안젤리카: "너는 너무 순진하거나, 너무 미쳤어."
토비: "예술가는 그래야지."
안젤리카: "아니, 예술가는 잔인해야 해."




"만담 속에서 날카롭게, 동시에 유쾌하게 활보하는 다채로운 담론"
★★★★☆(9.5/10)


- CineV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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