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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onechoi Aug 21. 2021

이웃 할머니가 백신 맞자마자 준 깜짝 선물, 감동이네요

"아 키운다고 고생이 많소" 수세미오이에 반찬, 간식... 따뜻한 선물들

지지난 주말에 일이다. 나는 이유식을 시작한 아기의 '이유식 육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내는 아기의 뒤를 따라다니며 장애물들을 치워 주었다. 혹 가지 말아야 할 곳에 가지는 않는지 계속 주의 깊게 관찰해야 했다. '하염없이 아기를 따라다니는 육상 경기'가 한참 열리고 있었던 시점이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아내와 나는 짜기라도 한 듯 깜짝 놀라 갑자기 얼어붙었다. 코로나 시기에 시작한 육아, 이 시간 더더욱이 주말에는 사람들이 잘 찾아오지 않았다. 올 사람도 없었다. 누구지?



다급히 가디건을 하나 걸쳐 입고 현관문으로 향했다. 현관문 너머로 동네 이웃인 할머님이 보였다. 할머니께서 문 앞에서 문을 열어 주기만을 기다리고 계셨다. 아기의 산책길에 자주 만나던 할머니셨다. 지난번 기사에서 소개한, '아기 옷' 때문에 다투셨던 할머니들 중 한 분이시기도 하다(관련 기사: 분홍색과 레이스 때문에... 대역 죄인이 되었습니다). 인사를 건네고 할머니를 맞이했다.


 


"아는 뭐 합니꺼? 뭐 드릴 게 있어 왔는데 잠시 드가도 됩니꺼?"



할머님은 아기의 안부를 물으며 들어가도 되는지 물으셨다. 아기가 놀고 있는 거실로 할머님을 안내했다. 할머니께 어떤 걸 좋아하시는지 여쭙고 차를 내어 드렸다.



할머님은 아기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차를 드셨다. 그리고는 아기의 두 배 정도 돼보이는 크기의 물건을 내미셨다. 대왕 수세미오이였다. 다른 할머니들께서 주셨다는 반찬통과 또 다른 할머니의 며느리가 챙겨주셨다는 과자들도 함께 가져오셨다.



약 20여 분의 시간, 아기와 부부에게 해주고 싶었던, 참았던 말씀들이 많으셨는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이어가셨다. 할머님께서는 다른 할머님들의 말씀들도 전달해 주셨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사투리들의 향연과 비와이의 랩의 속도만큼 빠른 할머니의 말씀을 듣다가 부부는 혼이 제대로 빠졌다. 



할머님께서 가시고 정신을 차리며 커피잔을 치울 때였다.



"여보, 근데 어디서 탄내가 나는 것 같지 않아요? 이게 무슨 냄새지?"


"앗 맞다 이유식 육수 냄비..."



할머님들이 깜짝 선물을 건넨 이유 


             




▲ 타버린 냄비 보시는 바다. 멸치가 안쓰럽다. 대 환장 파티도 종류가 다양하게 존재한다.


 


아기의 이유식 육수를 올려 두었는데, 할머님이 갑자기 찾아오시는 바람에 미쳐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냄비는 혼자 자신을 내버려 둔 것이 괘씸했었나 보다. 한참을 타들어 갔는지 새까만 몰골, 그 민낯으로 부부를 반겨주고 있었다. '대환장 파티'였다.



"이게 무슨 일이래요? 할머님들이 왜 갑자기 선물들을 보내오셨을까요?"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는데... 지난번에 할머님이 집에 한 번 들르라고 하셨는데 혹시 이것 때문이었을까요?"



그랬다. 얼마 전에 퇴근하던 길에서 오늘 오셨던 할머니를 뵈었다. 그때 할머니께서는 자신의 집의 위치를 알려 주시면서 아기가 귀엽다고, 무엇을 줄 게 있으니 꼭 한 번 들르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에 할머님의 댁 앞을 지나면서 '할머니께서 오라셨는데...' 생각은 했다. 하지만 직접 찾아가는 것이 꼭 '뭐 주세요 얼른...'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실천으로 옮기진 못하고 있었다. 


             




▲ 문제의 수세미오이 크기를 가늠하시기 편하게 바나나와 일부러 같이 찍었다.


 


다음 날, 할머니께서 알려 주셨던 집을 찾았다. 저 큰 수세미오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쭤보고, 고맙다는 인사도 드릴 겸 찾은 길이었다. 마트에서 사장님께 물어 할머님들이 평소에 좋아하신다는 3박스의 음료를 샀다. 



다행히 할머니는 집에 계셨고, 담장 위로 수세미들이 꽃을 피우고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도심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풍경이었다.



"할머니 지난번에는 경황이 없어 인사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전에 선물을 보내셨던 할머니들께도 전해 주세요. 그리고 이거 약소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아고 뭐 이런 거를. 감사하고로... 있어 보소. 내가 할머니들 오라 카께. 이번에는 직접 얼굴을 봐야 되는 기라. 이따가 할매들 오믄 아 아빠가 선물 주었던 할매들을 직접 만나서 인사하고 드리소."


             




▲ 할머니의 선물 할머님께서 가져오신 간식 중에 일부




할머니들께서는 쑥스러워하시며 음료수를 뜯어 드셨다. 그리고는 대화를 나누셨다. 할머님들께서는 아기를 자주 산책에서 마주치며 한 번 집에 들르고 싶으셨는데, 피해가 될까 못 오시다가 백신을 모두 맞고서야 찾아오시고 선물을 보내실 용기를 내셨다고 하셨다. 대화의 내용에서 할머니들이 왜 각자의 색깔로 선물을 주셨는지 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세미오이를 가져오신 할머니께서는 지난번에 아기를 보았을 때 마스크 대신에 일명 '코로나 모자'를 쓰고 있던 걸 기억하셨다. 미세먼지와 대기질이 안 좋은 요즘, 아기에게 수세미오이를 달여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선물하셨단다.



또, 감자를 조려서 반찬통에 담아 보내신 할머님께서는 아기 엄마가 입맛 없을 때 먹기 좋은 반찬이라 주셨다고 했다. 며느리의 간식 선물을 주신 할머님께서는 아기 엄마가 혼자 있을 때 갑자기 배가 고프면 먹으라고 챙겨 보내셨단다.


             




▲ 감자조림 할머니의 감자조림 선물


 


특히 백신을 맞고서야 우리 집에 직접 선물을 주러 오신 할머님은, 이 수세미오이로 아기의 젖병을 닦는 게 '플라스틱의 재질을 합성한 수세미'를 사용하는 것보다 좋을 거라고 이야기 해주셨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이 수세미오이를 수세미로 사용하기 위해 많이 길렀단다. 특히 아기가 있는 집은 감기나 천식 비염 등을 예방하고 치료하기 위해 이 수세미를 달이거나 즙을 내곤 했단다. 또 아기의 피부에 문제가 생기면 발라주기도 했는데, 효능이 있었다고 하셨다.



'할머니들은 예전부터 탄소 중립을 스스로 실현하고 계셨구나'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금처럼 육아 용품과 아기 용품이 존재하지 않을 때, 어떻게 하나도 아닌 많은 자식들을 길러냈는지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님의 말씀들을 듣고 보니 친환경 수세미를 하나라도 만들어서 아기의 젖병 등을 세척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요즈음에 출퇴근길이면 아기에게 수세미오이를 선물하셨던 할머니의 집 앞을 일부러 자주 찾는다. 예쁜 호박꽃을 닮은 꽃들이 주렁주렁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것을 본다. 그 옛날, 할머니들의 육아는 왠지 저 수세미오이를 닮아있지 않았을까. 할머니들의 삶은 수세미오이의 꽃을 닮지 않았을까. 



"뭐라도 해 주고 싶다 아닌교" 


             




▲ 8월 중순의 절정의 수세미 꽃 장마가 왔으니 이제 져버릴 꽃이라 독자들께 선물하는 바이다.


 


며칠 전, 할머니와 다시 만났다. 인사를 하는 나에게 할머니께서 말씀을 건넸다. 할머님의 진심을 전한다.



"요새 아 보기 힘든 시대인데 아 낳아 기르는 거 보니 뭐라도 해 주고 싶다 아닌교. 역병이 도는데 아빠 맘은 오죽할까이. 이제는 확진자가 천 명도 넘는다 카데. 언제든지 필요한 거 있으면 말씀 꼭 하시레이. 수세미 필요하면 언제든 오이소."



흉흉한 세상이라지만, 이웃에 이런 할머님들도 계셔서 세상이 참 살만 하지 않은가 싶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같은 부부들, 아기 엄마 아빠들께 할머니들의 주전부리의 달콤함과 감자조림의 깊은 맛, 그리고 저 수세미오이만큼 큰 격려와 박수를 보낸다. 



위의 할머니들과 동시대를 사셨을 분들에게,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의 일부분을 전하며 글을 마친다.


 

"어머니 무거워 얼마나 힘이 드셨어요? 머리가 펄펄 더우네요."
하며 몸을 주물러 드리곤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내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야아 서날미들(사내아이들)은 파 먹기는 잘 하믄서 이렇게 힘들게 져 나르는 어미 생각은 못 하더라. 기차간에서 잡는 통에 힘들게 숨켜(숨겨) 갖고 오구만 그 걸 모른단 말이다."

부모 형제를 모시지 않겠다고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같이 살아야만 행복했다. 시집온 지 벌써 50년이 지났어도 그때 여러 식구의 식량을 대느라 애쓰던 시절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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