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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Dec 15. 2019

뇌섹 할머니를 꿈꾸는 여자

우리가 죽을 때까지 일을 하기 위해서는


60대 노인이 섹시해 보이는 이유



 60대 노인이 섹시해 보일 때가 있다. 답은 아주 간단하다. 자기 일을 잘하기 때문이다. 자기 일을 잘한다는 것은 자기 관리를 잘한다는 것이다. 자기 관리를 잘한다는 것은 곧 체력 관리에 소홀하지 않다는 것이다. 체력 관리에 소홀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 더 이상 20대와 같이 젊지 않다는 것을 잘 인지하고 있다는 것인데. 사람은 자신이 인지하지 못한 것에 무지(無知)하고 인지한 것에 대해서는 철저하리 만큼 유지(有知)하다. 나 또한 그랬다. 허리를 다친 이후로 나는 일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 물론 이런 나의 태도와 시각이 바뀌게 된 데에는 내가 지금 두 발을 딛고 서있는 도시가 타이페이였다는 사실이 큰 역할을 하긴 했다. 내가 만약 대한민국에서 허리를 다쳤다면?이라는 가정을 해보긴 했지만, 그런 가정을 굳이 시간 낭비해가며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만약?이라는 물음표가 이제 더 이상 나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타이페이에서 허리를 다치고 들것에 옮겨져 실려가는 구급차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물론 실제 하는 새로운 세상을 나는 아주 많이 보긴 했다. 원하는 곳에서 공부를 해보았고, 절실하게 원했던 곳에서 일도  해보았으며, 나의 부모가 평생 가본 곳보다 훨씬 많은 나라를 다니며 무수한 경험을 하고 있는, 나름 성공한 인생이라는 편협하고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이불을 발로 걷어차고 허리를 일으키려는 순간 나의 일상이 무너지고 말았다. 일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앞이 캄캄하다'는 말은 이런 때 쓰이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인생 30여 년을 살면서 처음 느껴보았다. '신이라는 건 없어'라고 비웃던 내게 하늘에서 꼭 천벌을 내린 것만 같았다. 그런 멘털 상태에서도 나는 '무단결근하면 안 되는데 내일부터 당장 회사는 어떡하지' 이런 헛소리를 (중국어로) 허공에 대고 중얼중얼거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때 나를 지켜보던 구급 대원이 한마디를 던졌다. '지금 중요한 건 너의 몸 상태이지, 당장 내일 회사를 못 가서 어쩌지 하는 걱정이 아니야. '



 그랬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타이페이 시내를 달리는 구급차 안에서 나는 지금 중요한 것은 회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고, 여기까지 와서도 일에 치이고 회사에 메여 자발적으로 을이 되는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 내 삶의 주체는 나이고 그 누구도 나에게 갑질을 할 수 없으며 나의 선택은 오로지 나의 의지와 책임 하에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허리가 망가진 후 대성통곡을 하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그 유명한 말이 있지 않았던가? 깨달음은 언제나 늦다. 알았을 땐 이미 늦었다고.




다언어를 구사하는 뇌섹 할머니가 되고 싶어요.


 지금 다니는 회사에는 평가 제도라는 것이 있다. 물론 어느 회사나 이런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 회사는 조금 그 방식이 특이하다. 분기를 둘로 나눠서 일 년에 두 번, 즉 반년에 한 번씩 '자기 자신에 관한 셀프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한마디로 이걸 잘 쓰면 인센티브 보너스가 따로 나오는 형식이다. (대만에 있는 대만계 회사들은 대부분 일 년에 한 번, 설날에 큰 보너스를 지급하는데 우리 회사는 외국계 회사이기 때문에 이 보너스와 더불어 다른 형태의 인센티브를 추가 지급하고 있다.) 이 보고서의 맨 첫 칸에는 'Personal Dream=自己的夢想(與工作無關)을 쓰시오'라는 부분이 존재하는데 즉, 지금 하고 있는 일과는 무관하게 너의 꿈을 쓰라는 것이다. 처음엔 이 문구를 보고 적잖이 당황했다. 꿈을 쓰라니, 당장 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목표도 못쓰겠는데 내 꿈을 쓰라고? 사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안에 다 쓸 수 내용을 나는 일주일, 이주일을 고민하고 결국은 이렇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聰明地會多語言的阿嬤 

The clever and multilingual granny  

저는 보다 많은 언어를 구사하는 뇌섹 할머니가 되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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