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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Mar 20. 2022

너에게

자유라는 환희와 그 대가





 이번 대선은 참으로 박빙이었다. 뚜렷한 정치색이나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내게도 꽤나 커다란 파장이 일었는데, 미리 해외 부재자 투표자 신청을 하고 투표 마지막 날 부랴부랴 집을 나서는 무거운 발걸음을 느끼면서 2016년 해외 부재자 투표 때와는 사뭇 다른 긴장감이 분명 내게 있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자유라는 명목 하에 이 나라 저 나라를 떠돌아다니고 (지금이야 타이완에 정착한 것처럼은 보이지만)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지만 나이가 들면 언젠간 고국으로 돌아가리라 은연중에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결국 인간은 회귀성을 가진 동물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동의를 하고 실제적으로 또 그렇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태어난 나라로 돌아가는 일이 오히려 자연스러우면 자연스러웠지 딱히 거부할만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이번 대선 결과의 유무를 떠나 여러 대통령 후보들을 보면서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가 산다는 생각은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꽤 심각한 문제와 직면하게 됨으로써 요즘 조금 우울한 기분이 많이 들었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나 자신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 적이 없는 머리 정리하기 쉬운 숏컷을 사랑하는 여성으로 또 남녀노소를 떠나 모든 일에 있어 공평함을 중시하는, 그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결국 사람을 죽이지 않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의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믿는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물론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어느 정도 남자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이 없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런 아버지라도 난 여전히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이었고 그럼에도 내가 우울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슬픔'이었다.



 왜 우리는 이렇게 남녀로 갈라져야 하나. 왜 우리는 이대남과 이대녀라는 용어가 만들어지는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나. 아마 내가 지금 고국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면 진지하게 이민을 고민하지 않았을까부터 ‘타이완의 영주권을 따서 정말 다행이다’까지 어째서 이런 일련의 생각들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나는 뭔가 그런 말로는 쉽게 내뱉을 수 없는 가슴속 저 깊은 곳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슬픔 앞에 주저앉아 그저 몇 날 며칠을 밤낮으로 괴로워했다.




 이제  이상 내게 돌아갈 집이란 없어. 아마 평생 이렇게 떠돌며 살지 몰라. 평소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안에 숨겨진 가장 공포스러운, 하지만 대면하긴 힘들었던 문제점들이 나를 잠식하면서 그동안 내가 누려온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리고  자유를 누리기 위해 내가 책임진 그리고 지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것인지 나는 지금에서야 아주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역시  한몫을 하긴 했다.  대만에서 지내면서 중국을, 한국으로 돌아간다 해도 북한을 등지며 평생 살아가야  텐데 그럼 이런 불안과 공포를 죽을 때까지 안고 살아야 하나 하는 평소 하지도 않던 걱정들을 사서 하게 되었 결론적으론 설사 만약 정말 입에 담기도 싫은 그런 불행한 일들이 일어난다 해도   사실을 꿋꿋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거였다.




 나도 많은 것들이 무섭다. 아무렇지 않다고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여도 그래도 무섭다. 그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무섭다고 그냥 멍하니 서서 울기보다는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일을 잘해보자는 것이다. 나와는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른, 무서울 정도로 끔찍한 사상을 가진 이들이 절반이나 넘게 있다고 해도 그래도 걔 중엔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표를 찍었을 이들도 적지 않을 테니 적어도 내가 기대하던 일이 잘 되지 않았다고 너무 절망하지는 말자. 단 한 명이라도 나와 생각이 같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나는 자유 민주주의의 나라에서 태어났고 그리고 또 지금 이렇게 살고 있으니 내가 누리고 있는 이 자유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생각하면서 너무 빨리 포기하지는 말자.


 





현실이 우리를 배반할지라도

환멸이 나를 소멸하게 하지 말며

혐오가 나를 오염되게 하지 말며

실망이 나를 무기력하게 하지 말기를


박노해,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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