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카레의 맛은 모양보다 마음에서 온다.

by 혜윰이스트

퇴근길, 마트 진열대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 결국 카레 가루를 집었다.

익숙함 속에 위로가 있는 음식.

별다른 기대 없이도 나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맛.


집에 와서 양파를 썰었다.

감자와 당근을 꺼내 반듯하게 썰까 하다,

오늘은 손 가는 대로 뭉퉁뭉퉁 썰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했다.


생각해보면, 카레의 본질은 재료의 모양에 있지 않다.

어떤 카레 가루를 넣느냐, 어떤 마음으로 끓이느냐가 맛을 결정한다.

삶도 그렇다.

형태보다 방향이, 완벽함보다 진심이 더 중요하다.


나는 오랫동안 모든 걸 반듯하게 세워두려 애쓰며 살았다.

일도, 관계도, 감정도 흐트러지지 않게 다듬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세상은 언제나 내 계획보다 먼저 끓어오르고,마음은 어느새 타이밍을 놓치곤 했다.

‘잘 살아야 한다’는 말의 무게에 눌려 있기도 했다.

엄마로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모든 걸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니 정작 내 안의 불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뭉툭한 채소를 냄비에 넣으며 다짐한다.

“오늘은 조금 덜 반듯해도 괜찮다.”

삶의 완성은 균형이 아니라 온기에서 오니까.

이제는 알고 있다.

조금 덜 익은 하루도, 약간 짠 마음도 괜찮다는 걸.

모양이 고르지 않아도, 맛은 충분히 깊어질 수 있다는 걸.

모든 걸 다 챙기며 살면 좋겠지만, 정말 중요한 몇 가지만 챙겨도 삶은 제 맛을 낸다.


그 몇 가지는 거창한 게 아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아이의 웃음, 나를 위한 한 그릇의 식사.

카레를 저으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맛도 결국, 내가 고른 향신료로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는 성공이라는 향신료를, 누군가는 관계라는 재료를 넣겠지만 나는 오늘, 덜 반듯함을 택한다.

뭉퉁뭉퉁 썰린 재료들이 서로의 맛을 섞어가듯 삶의 거친 부분들도 결국엔 나를 완성시킨다.


오늘도 나는, 조금은 엉성하지만 분명 나다운 한 그릇을 끓인다.

그리고 조용히 되뇐다.

“삶은 반듯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내 안의 불은 꺼뜨리지 말자.”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