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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고양이 R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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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화 Jan 10. 2020

고양이 R

16화

얼마나 지났을까.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혀가 뽑아질 정도로 털을 핥았다. 기운이 빠져 발바닥이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겨우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렸다.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애도 없고 인간도 없다. 펑퍼짐하고 시들시들한 무더기만 눈앞에 깔렸다. 저 혼자 깔깔거린 두툼한 입술이며, 날아다니던 팔뚝이며, 굴러다니던 눈깔도 없다.       


어둠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비틀비틀 일어나 숨을 크게 쉬고 앞발에 힘을 주고 뒷다리를 번갈아 몸을 쭉 폈다. 주춤주춤하다가 집이 보이는 쪽으로 걸었다. 길은 길었고 여기저기 다른 길이 나왔다. 부들부들 떨면서 꼬불꼬불한 좁은 길을 걸었다. 길 저쪽에서 쿠앙~ 쿠앙~ 소리가 들렸다. 쇠붙이다. 철창 안에 있을 때 나를 싣고 다닌 쇠붙이하고 같은 소리였다. 순간 벽에 착 붙었다. 쇠붙이는 나를 본체만체 내 앞을 지나쳐 길 아래쪽으로 사라졌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 않았다. 털은 축축하고 배가 고팠다. 그제야 밤에 내게 일어난 일이 떠올랐다. 인간들이 안에서 밖으로, 밖에서 안으로, 앞에서 뒤로, 옆에서 빙 돌아 뛰어다녔다. 그때 코점박이 목소리가 들렸다. 어서 뛰어! 뛰어나와! 나처럼 뛰어! 분명 코점박이 목소리였다. 이 바보! 똥 멍청이! 쫄보!       

나는 뒤도 안 돌아봤다. 가슴이 쿵쾅대며 터질 것 같았다. 머리 위에서는 쉴 새 없이 번쩍번쩍하며 쩍쩍 갈라졌다. 물줄기가 몸통을 타고 콸콸 흘러 내렸다. 나중에 큰길 건너 고등어 녀석하고 정을 맺어 새끼를 낳았을 때 내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새끼들을 핥다 말고 말해줬다. 공기가 나른해서 무엇을 해도 좋은 날이었다. 우리는 뺨에 작은 점이 있는 인간이 만들어준 상자에서 한동안 잘 지냈다. 고등어를 닮아 쭉쭉 무늬가 뻗은 녀석이 내 턱 아래 얼굴을 들이밀며 자꾸 물었다.          


_뛴다는 건 뭐야?

_달리는 거지

_달리는 건 뭐야?

_뛴다는 거라구

_그러게 뛴다는 게 뭐야?

_그건, 야! 고양이는 그런 거 몰라도 돼

_왜?

_고양이는 몸이 다 알아서 해

_뭘?

_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춥지 않은 데 가고, 시끄러우면 조용한 데로 가고

_그럼 고양이는 뭐든 마음대로 하는 거야?

_꼭 그렇지는 않아     


나중에 그녀석이 쇠붙이가 다니는 길바닥에 찐득하게 엉겨 붙었을 때 나는 뛰는 것과 달리는 것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았다. 쇠붙이 앞에서 고양이는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쇠붙이는 눈을 희번덕 부릅뜨고, 천천히 걸을 줄도 모르고, 말 한마디 없이 고양이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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