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고양이 R 19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미화 Jan 11. 2020

고양이 R

18화

나는 다시 인간과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똥 때문에, 이번에는 밥 때문이다. 이거 하나만은 확실하다. 우리 고양이는 맛있는 밥과 맛없는 밥을 일일이 가려낼만한 능력이 있다. 아니, 뛰어나다. 맛있는 밥 앞에서는 인정사정없다. 목구멍이 있는 것들에게 목구멍을 채우는 건 가장 중하다. 그래서 목구멍이 있는 것들은 서럽다. 인간은 안 그런가? 고양이는 그렇다.       


새로 살게 된 인간은 언제나 나에게 맛있는 밥을 줬다.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 등을 톡톡 두드리고 보들보들하고 따듯한 손으로 내 머리와 얼굴을 만져줬다. 그럴 때면 나는 기분이 좋아져 양양 소리를 내며 여자 몸에 내 몸을 비볐다. 가끔 여자는 내 몸을 물에 담가서 내 기분을 망치곤 했지만 한바탕 소동이 끝나면 개운한 잠을 잤다. 나는 정말 만족했다.       


아이는 인간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았다. 야들야들한 손으로 내 등짝이며 얼굴을 만지고 자기 입을 내 입에 맞췄다. 아이 입에서는 늘 바스락이 냄새가 났다. 아이는 입을 크게 벌려 까르르르 소리를 내며 나를 꼭 끌어안았다. 우리는 말랑말랑한 몸을 기대고 몸이 쭉 늘어지도록 잤다.      

    

아이가 없을 때면 문 앞에 앉아 까무룩 졸았다. 노랭이가 나를 보고 히죽히죽 웃고, 코점박이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다. 흰둥이는 여전히 잠만 잤다. 얼룩이는 꼬리 없는 엉덩이를 실룩실룩 대며 똥을 쌌다. 어쩐 일인지 나는 그 애들을 멀찌감치 바라만 봤다. 잠에서 깨면 인간은 드르륵 드르륵 풀썩거리는 물건을 쇠붙이에 이리저리 대고 있었다. 집안 가득 노곤한 아득함이 아롱졌다.        

  

나중에 알았지만 고양이는 시끄러운 걸 싫어하면서 시끄러운 걸 포기하지 못하는 족속이다. 인간과 살면서 배고프지 않고 춥지 않아서 더 바랄 게 없음에도 편안한 고요와 간지러운 웃음이 싫증날 때가 있었다. 집 밖으로 나다니면서 저절로 뛰어넘기를 했다. 문 앞에 앉아 양양 소리를 내면 인간은 문을 열었다. 골목을 돌 때마다 오줌을 눴다. 어떤 집은 시큼한 냄새가 났고 어떤 집은 캄캄했다. 쇠붙이가 눈에 불을 켜고 달리는 큰길로 나가면 가슴이 벌떡벌떡했다. 내가 큰길에 앞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쇠붙이는 화가 난듯 큰소리를 빵-빵- 질렀다.       


이전 18화 고양이 R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