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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고양이 R 2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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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화 Jan 12. 2020

고양이 R

19화

그날은 어쩐 일인지 일찌감치 기분이 들떴다. 내가 밥을 일찍 먹고 안쪽 문 앞에 서서 인간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며 양양 대자 인간은 문을 열었다. 원래 내 생각은 골목만 돌고 집에 들어갈 참이었다. 그러다가 그 녀석을 봤다.             


영락없는 얼룩이였다. 산뜻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철창 안에서 등을 기댔으니 아는 체 할만하다. 골목을 슬렁슬렁 걷고 있는데 꼬리를 바짝 곧추 세운 얼룩이가 저 앞에서 걸어가는 게 보였다. 어둠이 집들과 길을 덮고 있었지만 얼룩이가 분명했다. 나는 야~아~앙 소리쳤다. 뒤를 돌아본 얼룩이가 갑자기 뛰었다. 멈칫 섰다가 다시 얼룩이를 불렀다. 얼룩이는 쇠붙이들이 다니는 길을 후다닥 건넜다.   

      

때마침 한쪽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지나갔다. 아이들 뒤를 따라 큰길을 건넜다. 얼룩이는 그새 안 보였다. 불이 환한 집마다 처음 맡는 냄새들이 났다. 어떤 냄새는 역겨웠고 어떤 냄새는 그냥 그랬다. 불빛과 냄새와 온갖 소리에 정신이 없었다. 털이 뻣뻣해지도록 돌아다녔으나 얼룩이는 보이지 않았다. 어느 길이 어느 길인지 몰라 휘둥그레하다가 저만치 나를 쳐다보는 얼룩이가 눈에 들어왔다.        

  

얼룩이는 등을 쫙 펴고 느릿느릿 걸어왔다. 불빛에 비친 얼룩이가 가까이 다가왔을 때 털이 얼룩덜룩하지 않다는 걸 알았다. 코 점박이만큼 큰 덩치였다. 나중에 인간들은 이 덩치를 가리켜 고등어라고 불렀다. 몸에서 나는 냄새도 나와 달랐다. 고등어와 나는 한동안 더 만났다. 내가 큰길로 내려가거나 고등어가 큰길로 올라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냄새를 맡고 몸을 비볐다. 인간이 안 다니는 으슥한 구석에서 몸을 핥고 섞었다.          


집에서도 고등어 생각만 났다. 아이가 몽글몽글한 손으로 나를 끌어안는 게 귀찮아졌다. 인간이 내 몸을 만지면 야앙! 성을 냈다. 내 모든 생각은 고등어에게 닿아 있었다. 인간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발을 동동 굴렸다가도 밥만 먹고 금방 나왔다. 고등어는 나의 모든 것이었다. 고등어를 골목에서 만나고, 쿰쿰한 냄새가 나는 어떤 집앞에서 만나고, 잠에서도 만났다. 고양이는 좋아하면 믿고, 온 힘을 다해 핥아 주고, 무심하게 헤어진다. 고등어든 얼룩이든 노랭이든 그런 건 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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