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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고양이 R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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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화 Jan 12. 2020

고양이 R

22화

모든 게 따분하고 시들했다. 밝음은 빠르게 왔고 어둠은 더디 덮쳤다. 콧속을 간지럽히는 바람만이 거칠 것 없는 집을 훠훠 휘젓고 다녔다. 찢기고 구겨진 바스락이는 들썩들썩 저 혼자 성에 받치다가 이리저리 구석으로 우르르 밀려다녔다.        

   

다리가 네 개 있는 아이 밑에서 늦잠을 자기 일쑤였다. 문 밖이 눈부시면 골목을 나갔다. 작은 소리에도 꼬불꼬불한 길이 웡웡 울렸다. 쇠붙이도 어쩌다가 느릿느릿 지나갔다. 쇠붙이에 실려 떠난 아이가 떠올랐다. 인간은 뜨문뜨문 보였고 입이 크고 사나운 짐승은 자주 보였다. 얘들은 눈에 불을 켠 쇠붙이처럼 떼로 다니며 소리를 질렀다. 소리만 들어도 털이 쭈삣쭈삣 섰다.   

       

가끔 나와 비슷하게 생긴 짐승을 길에서 마주쳤다. 나를 보고 일어서서는 입을 크게 벌리며 학학댔다. 큰 놈이나 작은놈이나 성을 냈다.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집에 들어왔다. 집은 너무 조용했다. 어둠 속에서 마당을 내다보거나 문 앞에 앉아 눈을 감고 귀를 세웠다. 바람이 지나가고, 마당애들이 몸을 흔들고, 먼 데서 쇠붙이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마당애들은 훌쩍 자라 똥을 누러 나다니는 길에 내 몸을 쓱- 훑었다. 그럴 때마다 부르르 털을 떨었다.    

       

아랫배가 늘어지면서 밥을 많이 먹었다. 밥은 점점 줄어들었다. 아랫배가 찢어질 듯 아프기 전까지는 나쁘지 않았다. 고양이는 언제나 지금을 산다. 잘 모르지만 저절로 아는 일이 생긴다. 저절로 알 것 같은데 끝내 모를 일이 있다. 저절로 되는 일도, 안 그런 일도 있다. 고양이 이름처럼 말이다.     

 

고양이 이름은 고양이지 깜장이는 뭐며 로미는 뭔가. 고양이는 또 어디서 온 건가. 괭이도 기막히다. 다 인간들이 마음대로 부르는 거다. 고양이는 저절로 알 수 있는 일은 있지만 저절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저절로 할 수 있는 건 아닌데 저절로 하고 저절로 아는 일이 있다. 길고 힘든 시간이었다.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하더니 온 몸이 뒤틀렸다. 나는 구석구석에 몸을 뭉그적 비비다가 뒹굴다가 이를 악물고 몸서리를 쳤다. 마당에 비틀비틀 나가서 마당애들 사이를 온몸으로 막 짓뭉개고 들어와 다리가 네 개 있는 아이 밑에서 힘껏 양~ 양~야앙~ 소리를 냈다. 바람이 없는 밝고 따듯한 날이었다. 


내 몸을 찢고 나온 애들은 바닥에서 꼬물댔다. 녀석들마다 혀가 꼬부라지도록 핥아줬다. 저절로 알았고 저절로 하게 된 일이다. 말캉말캉한 애들을 데리고 집을 떠날 때 나는 전처럼 쫄보가 아니었다. 누구든 못 만날 게 없고, 어디든 못 살 곳이 없을 것 같았다.


내 애들은 그 작은 입으로 오물거리며 젖을 빨다가 잠을 잤다. 보송보송한 애들만 봐도 기분이 뭉글뭉글 풀어졌다. 애들이 나를 따라 마당을 들락거리는 동안 마당애들은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똥을 누러 가는 길에는 꺼칠꺼칠한 애들이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집은 점점 더 어수선해지고 밥이 없었다. 밥은 저절로 생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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