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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고양이 R 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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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미화 Jan 16. 2020

고양이 R

인터뷰


【인터뷰】

단편소설 《고양이 R》을 쓴 작가 '윤'과 주인공 '고양이 R'(이하 'R'), 아는 사람만 아는 인터뷰어 미스 마플(이하 '마플')이 대담을 나눈다.




마플 : 안녕하세요, 작가님. 여기서 뵈니 묘하네요.

 : 네, 안녕하세요. 고양이를 한자로 ‘묘(猫)’라고 쓰는 데 적절한 표현이네요.

마플 : 그러게요. 자, 고양이 R님도 인사 나누시죠.

R : 안녕하세요.

마플 : 저는 양양 이러실 줄 알았습니다. 인간과 같은 말을 하시는군요!

R : 이 분이 그렇게 만드셨죠.

 :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일동 웃음)

마플 : 그럼, 대담을 진행하겠습니다. R님은 말씀하시다가 인간의 언어가 불편하시면 말씀해주세요.

R : 네, 고양이 말로 할까요?

마플 : 그러면 인간이 무슨 뜻인지 모르므로 인간이 쓰는 말로 부탁드립니다. 인간의 언어가 이해 안 될 때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어쨌든 R님은 두 가지 말을 다 사용하시니까 그게 부럽습니다.

R : 저런, 인간은 여전히 고양이 말을 못 하는군요.

 : 사설이 깁니다.

마플 : 네. 알겠습니다. 우선 제 스타일대로 가장 궁금한 점부터 작가님에게 여쭙겠습니다. 작품에서 고양이 이름 ‘R’은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요?

 : 상상의 재미인거죠. 굳이 말씀드리자면 영어로 길을 로드(Rod)라고 하죠. 길고양이를 상기한다는 의미로 해석하셔도 됩니다. 고양이는 생물학적 분류에서 포유류입니다. 식육목 고양잇과에 속하잖아요. 인간처럼 새끼를 낳지요. ‘고양이 R’을 입말로 소리 내면 ‘고양이 알 ’이 되죠. 조류처럼 알에서 태어난 고양이가 되는 셈입니다.

마플 : 저는 박혁거세처럼 알에서 태어난 고양이인 줄 알았습니다. 부모가 안 나오잖아요.

 : 가능하죠. 소설은 전지전능하니까요.

마플 : 이름 한 가지 갖고도 이렇게 계산을 해야 하니 작가들은 정말 힘드시겠습니다.

 : 이 소설은 쓰는 데 힘들지 않았습니다. 미리 큰 구도를 세우고 자잘한 부분은 그때그때마다 붙였거든요.

마플 : 그런데 이름에 그런 뜻을 담으셨잖아요.

 : 제가 좀 즉흥적이라서요.

R : 그래서 제 이름을 그렇게 성의 없이 지은 거군요.

 : 넘어가시죠!

(일동 웃음)


마플 : 자, 잠시 분위기를 환기시켜봤습니다. 이 소설에서 배경이 되는 동네 말입니다. 작가님이 특정 지역을 염두에 두고 쓰신 겁니까? 끝이 없는 골목, 무너진 집, 빈집, 포클레인, 싸움이 있고요. 첫 등장은 시장 같은데요. 그게 깨끗하게 정비된 시장 같지가 않아요. 들썩이는 물건으로 물건을 덮는 장면도 나오고 고양이나 새를 철창에 담아 팔고 다니는 장사꾼도 나오고요. R이 깜장이라고 부른 남자네 집에 실려 갈 때는 다리도 나옵니다. 큰길을 사이에 두고 윗동네는 좀 우중충합니다.

 : 배경이 되는 공간은 시골 읍내입니다. 시골장터에 고양이 장사꾼이 고양이를 팔러 온 거죠. 도시도 그렇지만 시골 읍내도 중심부와 주변부가 확연히 달라요. 중심부에는 공공기관, 은행, 병원, 학교, 경찰서, 식당, 상가가 있고 다리 건너에는 낡은 집이 있어요. 중심부 가까이 아파트, 빌라, 새로 지은 듯한 단독주택이 있는 것과 대조적이죠. 도시도 마찬가집니다. 지역 어디를 가든 경제와 문화, 교육과 생활 편의가 한 곳으로 몰려 있습니다. 집값 차이도 나죠. 대개 이 경계 기준은 큰길과 다리로 정하지요. 소설에서 윗동네가 우중충한 건 재개발이 지정된 동네입니다. 늙거나 가난한 사람들만 떠나지 못하고 빈집 사이에 남아 있는 거죠.

마플 : 아, 재개발 지역이군요. 재개발은 낡고 허름한 동네를 말 그대로 새로 만들어서 쾌적하게 조성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소설에서는 인간들이 막 싸웁니다. “나를 여그다 묻어” 라고 분노하죠. 보상을 해 주는 건데 왜 그런가요?

 : 재개발이라는 말은 1970년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으로 압니다. 1960년대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했지요. 당시 기술이나 자원이 없던 우리나라에선 시멘트 원료가 되는 석회석만은 풍부했어요. 우리나라가 보유한 석회석 가채년도가 5천 년이나 된다고 해요. 학교에서 5천 년 역사라고 배우죠. 그 5천 년을 떠올려보세요. 감을 잡을 수 없는 시간입니다. 석회석 가채년도 5천 년은 엄청난 매장량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 석회석을 써서 경제를 살려야 했지요. 대외적으로는 중동에 석회석을 수출하고 건설노동자도 파견해서 달러를 벌었습니다. 내부 경제는 건설 붐을 일으켰지요. 지금도 콘크리트 관련 책을 검색하면 어마어마하게 검색됩니다. 건축 기사 시험 문제집부터 연구 자료까지 아마 우리나라 단일 장르 출판물로는 최대가 아닐까 싶은데요.

마플 : 1970년대 경제개발에서 이 건설 붐을 주시해야 하겠군요. 석회석 매장량도 놀랍거니와 결과적으로는 그 천연자원이 토건 경제 바탕이 되었다는 말씀이잖아요. 정부가 주도한 산업정책 시발점이 토건이라는 데에는 많은 분들이 이의제기는 하지 않을 것으로 압니다만 이촌향도(離村向都)와 재개발도 무관하지 않아 보이고요. 어떠세요? 작가님이 보시기에는 아까 말씀하신 주변부 낡은 집과 이촌향도 말입니다.

 : 마플님이 이촌향도 잘 말씀하셨습니다. 1970년대 시골에서 새마을 운동이 일어났지만 결과는 이촌향도 가속화를 낳았습니다. 쌀 생산량 증가, 작물 재배 다양화, 주거 환경 개선이 되긴 했습니다만 반면에 그건 원래 가진 사람들이 누릴만한 조건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 소작농이나 무산자들에게 시골은 살 수 없는 곳이죠. 이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듭니다. 고향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도 자식만큼은 공부를 많이 시켜서 고생하게 만들지 않으려고 자식을 도시로 유학 보냈어요. 도시 학교로 진학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서 도시로 간 젊은이들이 늘어났습니다. 결국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고학력이든 저학력이든 시골로 간다는 건 경제 수준 하락을 뜻하는 거니까요.     


시골에서 도시로 간 이유는 교육과 일자리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도시는 정부가 주도한 경제개발 계획으로 공장이 급증했거든요. 시골에서 도시로 이동한 사람들은 셋방을 살거나 달동네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습니다. 조금 여력이 되면 시멘트 벽돌로 지었지요. 무허가 건축인 셈인데 이 집들이 오래되면서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재개발 지정 1순위가 된 것이지요. 도시빈민으로 재개발 관련 유명한 사건이 있어요. 1977년 광주에서 한 청년이 무등산 기슭에 지은 집을 철거하러 나온 동구청 직원 4명에게 흉기를 휘둘러 죽이거나 다치게 했어요. ‘광주 무등산 타잔 박흥숙 사건’처럼 도시빈민과 재개발 문제는 그 이전에도 사회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소설가 조세희 선생이 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1975년 신문 연재로 큰 반향을 불렀죠. 1981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이 성공회대 교수 재직 당시 쓴 《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에도 1970년대 개발경제와 도시빈민이 상세히 나옵니다. 1980년대 들어서 재개발 철거사업은 용역사업으로 외주화되었고 2009년 1월 20일 발생한 용산참사처럼 공권력과 용역조직이 합세한 강제철거는 이후에도 사회문제로 여진이 계속되고 있지요. 아현동, 구룡마을, 동작동 등 서울뿐만 아니라 전주, 인천 계양구 등 대도시 재개발 사업에서 빈민은 길고양이와 같은 처지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앞으로 재개발이 어떤 방향으로 결정되느냐에 따라 영끌, 빚투와 같은 부동산 문제를 포함해 사회 공동체 가치관 유지와 공존의 의미가 갈라질 것 같습니다.      


마플 : 덧붙이자면 아파트 평수에 따라 상대방을 품평하고 임대 아파트 주민을 차별어린 시선으로 보는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아 보입니다. 광주 무등산 박흥숙 사건은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유트뷰에도 자료가 있더군요. 재개발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보상금 얘기해 볼까요? 결국 이촌향도 한 분들이나 도시빈민이신 분들이 거주한 집들이 대다수일 텐데요. 물론 이촌향도로 신분상승에 성공한 분들도 계시지만 영세민으로 사시는 분들은 여전히 좋지 않은 주거환경에 계속 노출돼있지 않습니까. 이 소설에서도 보상금 문제로 다투는 장면이 나옵니다. “수십 년 산 내 집을 강제로 내쫓는 게 법여?”, “애들 공깃돌 살 돈도 안 되는 거 손에 쥐어주고 보상금이라니” 이런 말이 나오죠. 보상금이란 다른 곳에 집을 구하라고 주는 말 그대로 보상이잖아요. 그 돈으로 집을 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또 새로 지을 아파트에 들어가기에도 부족해서 대출을 받아야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살았던 집보다 더 좋은 곳을 구할 정도의 넉넉한 보상금을 지급하기에도 비용 부담이 클 테고요.

 : 일본의 문학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은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책에서 보상금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부담감을 돈으로 돌려주면 되기 때문에 죄의식이 사라지고 말았다” 이걸 “비즈니스”라고 부르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보상금은 가해자나 주관한 쪽에서 그렇지 않은 상대에게 지급하는 비용입니다. 정당한 지급은 대상자가 처한 상황, 조건, 현실을 감안한 동등한 비용이어야 합니다. 돈으로 환산하는 일이 쉽지는 않지만 물질적 비용으로라도 그 이전과 비슷한 상태로 환원할 정도로 충족시켜줘야 하거든요. 보상금은 기본적으로 상처를 위로하고 재활하는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죠. 왜냐하면 고진이 말한 것처럼 정부는 국민을 납세자로 인식하지 무엇을 제공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재개발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석회석, 즉 시멘트와 철광 산업이 개입합니다. 노동인력도 동원되고요. 그렇게 해서 주거환경 개선을 꾀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돈이 개입한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됩니다. 돈, 즉 보상금을 넉넉히 주기에는 부담 간다고 마플님이 말씀하셨는데요, 당연합니다. 잉여금은 기업이 가져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업은 이윤추구가 첫 번째이자 마지막 목표입니다. 그래서 고진은 자본주의로 운영되는 국가경제는 모든 게 비즈니스라고 부릅니다. 마플님께 질문 드릴게요. 만약 재개발 지역 주민에게 보상금이 제대로 계산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마플 : 흠, 기업이 이윤을 적게 가지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정부가 재분배 정책을 쓰든가요.

 : 이론은 그렇습니다. 이론처럼 되지 않는 건 어지간한 대기업과 정부가 밀월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큰 납세 업자인 대기업을 무시할 수 없지요. 기업이 돈을 잘 벌어야 세금을 많이 받을 수 있고요. 그런데 큰 기업일수록 정부 지원금도 많이 받습니다. 세금을 내고 지원도 받는 게 이상한 거 아닌데 문제는 지원받는 만큼 세금을 잘 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정부가 큰 기업에게 지원해주는 비용은 어디서 나온다고 보시나요?

마플 : 국민요.

 : 그렇죠. 그런 국민을 기업의 더 큰 이윤을 증대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개발 사업을 기업에게 할당해주는 일도 정부가 맡지요. 정부는 하얀 셔츠를 입고 깨끗하고 정돈된 사무실에 앉은 몇몇의 담합으로 결정된 합법으로 보상금을 지급합니다. 기업은 그 결정에 따라 잉여금을 챙깁니다. 문제는 그 합법적 기준이 주민의 생존권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데 있어요. 세입자나 그 지역을 기반으로 생업에 종사하는 영세 자영업자는 선택권이 많이 없습니다. 자가 소유라 해도 보상금으로는 타 지역으로 이주할 여건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시위할 때 공통적으로 주장하시는 게 있어요. 가난하고 볼품없어도 그냥 내 집에 살게 해 달라는 거죠.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는 호소인 겁니다. 요즘은 재개발 대신 ‘도시 재생 사업’이라고 이름을 바꾼 모양인데 재개발과 크게 다르진 않은 것 같더군요.

마플 : 그럼 이 분들은 결국 사업이 시행되면 그 지역을 떠나야 하는데 어디로 가시나요?  《고양이 R》에서도 쇠붙이들이 와서 짐을 싣고 어디로 가긴 가잖아요.

 : 공시지가 기준 보상금을 받았을 테니 비슷한 조건의 집을 찾았든가 아니면 세입자가 될 것으로 추정합니다. 공시지가 기준 보상금은 현실 부동산 비용에 근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주 대책이 될 수 없어요. 심지어 쪽방촌이나 고시원으로 향하는 분들도 계실 테고요. 아예 생활기반이 된 지역을 떠나 집값이 더 싼 곳을 찾을 수밖에 없는데 그런 곳은 생업활동이 난관이죠.

R : 인간이 살 수 없는 곳에서는 고양이도 살 수 없어 떠납니다. 저처럼 어느 정도 인간이 주는 밥에 기댔던 고양이는 야생으로 돌아가 살기가 어려워요. 입이 큰 짐승도 나중에는 안 보이잖아요. 소거되었거나 물건처럼 수거된 것 같아요.

마플 : 그래서 R님이 큰길 건너 식당가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어요. 밖에서 새끼들과 살 때 잠깐 밥을 주던 여자도 떠난 다음에는. 부부가 며칠 밥을 주긴 했는데 그 부부도 R님을 데리고 가지 않잖아요.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더 나은 환경으로 이주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랬다면 함께 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잖습니까. 나중에 R님이 회고하시기를 큰길로 나아가 살던 동네를 올려다보니 “고개만 아팠다”라고 합니다. 고층아파트인 거죠?

 : 네. 대기업이 지은 고층 아파트죠. 수십 층이니까 “까마득하다”고 R님이 그러시죠. R님이 “소거되었거나 수거되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존중받지 못하는 공통점으로 보면 이 소설에 나오는 많은 ‘물건’과 R님 처지가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사회적 난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개와 고양이를 시민단체에서 데려간 것으로 묘사했습니다만 집을 내주고 터전을 반강제로 떠난 주민도 갈 곳이 마땅치 않다는 의미에서 사회적 난민이죠. 사회적 난민은 저소득층, 저학력층, 장애인, 가난한 홀몸가정, 노인, 여성, 어린이 등 빈민층이 주로 이룹니다. 사회적 약자보다 더 강한 뜻이에요. 이들은 자가 집이 없고, 있다고 해도 변변치 않습니다. 재산이 거의 없고 고소득 직종에 속하지 않고 게다가 차별, 편견, 심지어 혐오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 사회적 난민이신 분들은 사회에서 소거해도, 즉 사라져도 눈에 띄지 않아요. 적게나마 세금을 내는 국민인데 제외해도 무방한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이 분들이 사는 주거지역을 희생해 토건기업이 이윤을 쌓고 정부는 환경정리를 하게 되죠. 공공임대주택을 지어 저렴한 비용으로 제공해도 상황이 개선될 수도 있어요. 공공임대주택이 꼭 아파트로 규정할 필요도 없고요, 지금처럼 기승전아파트라는 도식에서 벗어나 인식전환을 위한 담론도 필요합니다. 부동산 문제 해결을 정부의 의지 문제로 볼 것인지, 토건 기업의 이윤 추구 문제로 볼 것인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마플 : 작가님은 후자로 보기 때문에 해결이 안 되고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 이제까지 과정을 보면 그렇습니다. 재개발에 ‘사업’을 붙인 것만 봐도 짐작할 만한 일이 아니겠어요. 나라에서 재개발을 지정하면, 누군가 사업을 해야 하는데요. 사업은 기본적으로 이익을 목적으로 발현됩니다. 그 이익의 주체가 누구인가 살필 필요가 있는 거죠. 제가 내린 재개발과 부동산 정책은 토건 제국의 일방적 부흥입니다. 정부는 표면적이고 세련된 명분이 필요하니까 환경개선이나 주민편의를 표방하고요. 이게 실제 삶과 괴리가 없어야 하는데 현실은 빚 없이는 아파트 입주 어렵고, 아파트에 입주할 여건을 못 갖춘 재개발 지역 저소득층은 더 열악한 주거환경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마플 : 그렇군요. 사회적 난민이 어떻게 양산되는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책을 결정하시는 분들이 심도 깊게 고민하셨으면 좋겠어요. R님에게 질문을 드려야겠습니다. 작가님과 저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 초대해 놓고 죄송하네요. 간식은 대담 끝난 후 많이 드릴 테니 좀 참아 주실 수 있죠?

: 아까 윤님이 간식을 주셨어요. 지금은 배가 부르니 좀만 참겠습니다.

마플 : 하하하하하 고맙습니다. R님은 왜 인간을 믿을 수 없는 족속이라고 하시죠? 조금 타박을 해서 그렇지 밥을 주고 집에서 함께 산 인간도 있는데요.

: 왜 긴요. 밥을 주고, 쓰다듬어주고, 폭신한 자리도 마련해 주고, 따듯한 집 안도 허락했죠. 고맙긴 합니다. 근데 이 분들은 자기 기분이 안 내킬 때는 저를 밀쳐냈어요. 욕도 하고. 묶어 놔서 꼼짝 못 하게도 했죠. 제가 봤을 때는 인간 기준으로 저를 대한 거예요. 제 기분보다는 자기 기분이 먼저였어요. 잘해주면 끝까지 잘해줘야지 그게 뭡니까. 아이와 살던 여자도 그래요. 아이가 헤어질 때 발버둥 쳤잖아요. 그런데도 저에게 말 한마디 없이 떠났어요. 마지막 부부도 그래요. 자기들이 급하다고 저와 제 애들을 두고 떠났어요. 늙은 부부도 집안으로는 저를 들여보내 주지 않았고요.

 : 인간중심주의, 그래서 서운한 거죠?

R : 서운하죠. 자기 마음 내킬 때만 이뻐해 주는 거잖아요. 어려울 때 끝까지 함께 하지 않고.

마플 : 서운하시겠어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아이와 사는 여자는 가내수공업 같은 걸 하면서 어렵게 사는 것 같아요. 남편은 안 보이고요. 동네를 떠나면 어디로 갈지 짐작이 가는 바인데, R님까지 챙기기에는 좀.

R : 그 빈 집에서 저 혼자 첫애들을 낳았어요. 얼마나 무서웠는지 아세요? 인간은 믿을만하면 떠났어요. 다들 살기 어렵다는 이유겠죠.

윤 : 안 떠난 인간도 있어요. 깜장이라고 부른 남자네 집에서는 폭풍우가 몰아치면서 문이 열린 사이에 나왔잖아요. 그 집에서 가만히 있었다면 그 험한 여정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마플 : 그러게요. 그런데 그러면 또 이 소설이 전개가 어찌 될지 알 수 없어요. 으흐흐흐

 : 그렇죠. R님에게는 미안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설정이었습니다.

R : 에휴~ 그래도 저는 어디 안착할 줄 알았어요. 아이와 살던 여자네 집 말에요. 거긴 믿을만했어요. 아이도 저와 얼마나 사이가 좋았게요. 제 꺼끌꺼끌한 혀로 핥아주면 눈물을 뚝 그쳤죠. 가난하지만 살만했던 집입니다.

마플 : 그 집에서 살면서 고등어와 연애도 하시고. 후후후. R님이 인간을 믿지 못할 만해요. 철창 안에 가둬 놓은 남자 기억이 최초인 거죠? 그 어릴 때부터 인간에게 부대끼기 시작했으니까요. 골목에서 만난 인간들도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지만 쇠붙이는 정말 공감 많이 갑니다. 작가님, 쇠붙이가 자동차를 가리킨 거죠?

 : 네. 자동차에 치여 죽는 고양이를 자주 봐요. 로드 킬은 길고양이가 희생되는 경운데 R님처럼 밥을 찾으러 다니거나 짝을 찾으러, 또는 서식처를 바꾸러 가다가 희생되죠. 이 모습이 저는 꼭 재개발지역에서 밀려나 사회적 난민이 된 분들과 겹칩니다. 비약일지도 몰라요. 그런데 계층 사다리가 끊어진 지금 사회 구조에서 재개발 지역 주민 상당수가 지역을 떠나 재기할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고 있지요. 이제는 부동산에 금융자본까지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거든요.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폭주하는 쇠붙이는 자본주의 상징인데요. 로드 킬을 볼 때면 저절로 사회적 난민이 반사됩니다. R님이 윗동네를 떠나 애들을 데리고 큰길 건너 식당가로 옮길 때도 희생됐어요.

마플 : 그 부분을 작가님은 건조하게 서술했어요. “바닥에 뭔가 납작한 게 붙어 눈을 껌벅인다”라고만 했어요. 새끼가 죽은 장면을 제삼자 독백처럼 처리했단 말에요. 어떤 의도가 있던 건가요?

 :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서 이런 문장이 나와요. “온종일 망루에 앉아 바다를 바라봤다” 굉장히 스트레이트한 문장이죠. 적군이 언제 공격해 올지 모르는 일촉즉발 긴장 상태잖아요. 부하들도 잃고 전세는 열세고 조정은 무능하고. 바람 앞의 촛불이 흔들리는 초긴장 상태에서 망루에 앉은 장수의 뒷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고독과 비장감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저는 극적인 상태에서는 이런 초압축 문장이 외려 매력적이더군요. 소설은 기본적으로 독자의 상상을 자극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모든 걸 일일이 다 설명하면 지루합니다.  

마플 : 게다가 “눈을 껌벅인다”라고 썼어요. 아직 그 어린 새끼가 죽지 않고 어미 쪽을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잖아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지더군요. 왜 단번에 죽이시지 않고 그러셨어요. 잔인하게 계속 자동차가 연이어 오고.

 : 잔인했죠. 네 잔인해요. 그런데 설명드리자면 이런 상황은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사실에요. 불편하다고 소설에서 그걸 빼거나 순화한다면 그건 작가 스스로가 작품을 왜곡하는 겁니다. 어떤 일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지만 외면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요. 작가는 그 불안정하고, 불편하고, 불리한 대상을 정면 응시해서 독자에게 중계해줘야 하는 직업이라고 봐요. 거기에 저는 ‘문학의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마플 : R님은 잠자코 계신데, 눈앞에서 새끼를 잃었을 때 참담했겠어요.

R : 고양이는 참담하다는 말을 모릅니다. 죽음도 몰라요. 다만 떨어진다고만 생각해요. 그날도 뭔가 안 좋은 감이 와서 다가가 확인해보려고 했는데 쇠붙이가 계속 왔어요. 저는 남은 애들을 데리고 그곳을 떠나야 했죠.

 : R님 말씀처럼 죽음을 생각하는 건 인간뿐이라고 합니다. 짐승은 죽음이 무엇인지 몰라요. 제 생각으로는 고양이나 개, 여타 다른 짐승은 삶과 죽음 개념 자체가 없는 것 같아요. 그들도 감정은 있지만 죽음의 감정은 없는 거 아닐까요? 이를테면 고통스럽게 새끼를 낳을 때는 불쾌하고 아프다고 느끼고 새끼가 죽었을 때는 뭔가 찜찜하다고 느끼는 거죠. 허전하고요. 그 감정이지 죽음이 다시는 만나지 못하기에 슬프다, 완벽한 이별이다 하는 식의 감정이 없는 거죠. 그런 점에서 짐승은 생사에 연연하지 않는 존재 같습니다.


마플 : 그러고 보면 R님에게서는 밥과 똥이 떠올라요. 똥 때문에 인간과 살기 시작했다가 밥 때문에 길고양이로 거듭나고요. 원초적인 설정이라고 봅니다. 인간에게도 이걸 적용할 수 있는 것 같은데요.

 : 그럼요. “목구멍이 있는 것들은 서럽다”거나 “목구멍은 중하다”, “그래도 목구멍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자기가 싼 똥은 깨끗하고 남의 똥은 더럽다고 생각한다”라고도 하죠. 코점박이가 힘을 말하고 나니까 “코점박이 똥도 냄새가 난다”라고 속말을 합니다. 짐승에게는 가장 원초적 본능이 강하죠. 인간이라고 다를까요?

마플 : 코점박이가 힘을 얘기하잖아요. 힘이 셀수록 할 수 있는 게 많다고요. 그건 돈이죠?

 : 돈도 되고 권력도 되죠. 자본이 맹공일수록 명예가 밀려나는데 저는 이 점을 좀 눈여겨보고 싶어요. 명예라고 하면 석학이나 유명인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우리 같은 사람도 명예가 있거든요. 이름을 널리 알리지 않아도 누구에게나 자존감이 있고 긍지라는 게 있으니까요. 명예란 존엄성입니다. 물질로 판정할 대상이 아닌 명예조차 돈으로 매매하고 권력이 수탈하는 것 같아 씁쓸해지긴 합니다만.

마플 : 점점 그런 사회로 나아간다면 R님은 대체 어떻게 살까요. 저는 R님은 단순한 길고양이가 아니라 작가님이 말씀하신 사회적 난민을 대입한 대명사가 아니었나 싶은데요. 어떠십니까?

 : 그렇습니다. 이 소설을 길고양이에 한정해서 읽지 마시고 재개발, 부동산 정책, 사회적 난민을 떠올려보시기를 권합니다. 고양이는 인간에게 많은 영향을 끼치죠. 주로 선한 영향입니다만 그럼에도 인간과 공존하는데 많은 난관이 있습니다. 저는 그 주요 이유가 편견, 고정관념, 인간의 이기심이라고 봅니다. 특히 길고양이는 사회적 난민을 떠올릴 때 더 많은 의미를 투사할 수 있어요.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이 아닙니다. 앞에서 R님이 지적하셨듯이 인간이 떠난 곳은 고양이가 사는 데 힘든 환경입니다. 고양이가 살 수 없는 곳도 인간이 살기에는 안 좋은 환경이죠. 인간과 고양이는 다른 여타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네트워크 관계입니다. 이런 점에서 R님을 사회적 난민으로 해석하시면 공존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마플 : 네, 알겠습니다. 긴 대담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작가님께 질문드리겠습니다. 고양이와 사신 적 있으세요? 아니면 지금 집사님이신지요? 소설에서 보면 고양이 행동을 세밀히 묘사했거든요. 의성어, 의태어 동원하시면서 부사까지 잔뜩 섞으셨어요

 : 고양이와는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했어요. 지금은 고양이와 동거하지 않습니다만, 고양이에 관한 얘기라면 저도 추억이 많아요. 그리고 부사는 소설을 쓸 때 껌딱지처럼 애용합니다. 적어도 소설에서 부사는 문장의 윤활유에요. 문장을 맛깔나게 살리고 독자에게 전달 효과가 뛰어납니다.

마플 : 아하, 그렇군요. 마지막으로 R님과 작가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 전해주시죠.

: 조금은 덜 춥고 덜 배고팠으면 해요.

 : R님이 소설에서 여러 번 말합니다. 춥지 않고 배고프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우리 인간에게도 가장 중요한 이야깁니다. 그런데 그 단순한, 기본 생존권을 지키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사회가 된다는 건 참혹한 투쟁과 부조리로 얼룩진 화려한 야만사회를 연상케 합니다. 우리에게 아직 존엄성이 남았다면 외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물건처럼, 어떤 경우에는 물건보다 더 하찮게 취급을 받는 생명체를 생각해보세요. 함부로 방치되거나 학대받고, 버려지고, 심지어 살해당하는 길고양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결국 인간 문제이기도 합니다. 연민이나 소거 대상이 아닌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 사안을 대했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길고양이 몇 마리 품어주지 못하는 동네라면 그런 동네에서 사는 인간도 행복한지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설을 공존과 존엄문제로 썼습니다.

마플 : 네, 알겠습니다. 밥과 장미도 떠오르고, 밥과 똥도 떠오르고, 똥은 정직하다는 말도 떠오릅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사이에 경계에 있거나 경계에서 밀려난 모습들을 떠올려봐야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공통 문제이기도 하구요. 긴 대담 고맙습니다. 특히 R님은 고단한 여정에도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길에 다니실 때 늘 조심하시고요, 추운데 조심히 가십시오.          

 : 네, 고생하셨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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