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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정도 호사는 누릴 자격이 충분하니까.

by 고요지안

2013년 겨울. 대규모 IT 프로젝트가 끝나고 안정화 단계에 진입하는 시점이었다.

당시에는 야간 시간대 시스템을 관제하기 위해 업무 담당자들이 야간 당직 업무를 수행했었다. 물론 익일은 휴식을 보장해 줬다. 요즘은 EMS(Event Management System, 실시간으로 감시해서 이벤트 발생 시 문자 등으로 알림)나 야간 당직 전담 인력을 두고 관제를 했지만 당시에는 그런 식으로 진행을 했었다. 체력이 되고 열정적인 팀원은 2~3주에 한 번씩 수행하는 야간 당직 업무를 기다리곤 했다. 시스템 모니터링이라는 핑계로 밤새 영화도 보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고, 다음날은 편안히 쉴 수 있으니 그들에게 최고의 시간이었던 셈이다.

일부 팀원들 사이에서는 최신 영화를 파일 서버에 업로드해 이용하는 관행이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물론 요즘은 내부 통제나 보안, 저작권 침해 등 다양한 이유도 언감생심 상상도 할 수 없는 행위다.)


그날은 나의 차례로 밤샘을 하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사무실도 싫었고 난방을 하더라도 겨울이라 춥게만 느껴졌었다. 무엇보다 밤새 뜬눈으로 보내야 하는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고민을 하던 찰나였다.

그 순간 갑자기 당시에 즐겨 듣던 영화 음악이 생각이 났고 그날은 그 영화를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익일 01시가 지나면 중요한 job이 종료되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다.)


개인용 랩탑을 가지고 다녔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그 영화는 군입대 전에 처음 봤던 영화로 당시에는 그냥 유명한 영화이고 명작이라는 평가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호기심에 보았던 영화였다. 다만 영화 음악만큼은 언제 들어도 편안하고 좋았던 곡이었기 때문에 그 영화는 나의 생활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던 거 같다.




"시네마 천국(Cinema Paradiso, 1988)"


그날 밤 넓은 사무실에서 혼자서 그 영화를 보며 많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다.

바쁘게 생활했던 내 모습을 뒤돌아보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가 끝나고 새벽이 깊어 몸은 피곤했지만, 영화 속 장면들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밤을 꼬박 새웠던 기억이 있다.


그날 이후 그 영화는, 내가 지치거나 평온이 필요할 때면 찾게 되는 영화가 되었다.


지난 금요일, 우연히 지나던 길. 문이 활짝 열린 카페에서 엔니오 모리코네의 'Love Theme'가 들렸다.

(시네마 천국 OST 수록곡 중 한곡)

일주일간의 생활에 지친 몸이었지만 그날 밤 나는 다시 그 영화를 보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큼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2시간 50여분의 러닝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이영화의 백미는 역시 마지막 장면에 있다.

성인이 된 토토가 알프레도가 남긴 필름 릴을 재생하는 순간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과거를 회상하는 토토의 모습을 보며 나도 나의 시간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무심히 지나친 일상도 소중하고, 힘들다고 느끼는 매 순간들도 의미가 있었음을 느끼게 했다.

마음에 오래 머무는 영화가 하나쯤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행운인 듯하다.


지치고 힘들 때 마음을 다독여 줄 무언가를 하나쯤 마련해 두고 온전히 나를 위해 써 보자.

만약 출퇴근에 지쳐 있다면, 그 정도 호사는 누릴 자격이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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