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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지만 지켜야 한다.

by 고요지안

내가 근무 중인 곳은 금융권의 IT팀으로 까다로운 정보보호 규제를 준수해야 한다.


여기서 규제 준수는 단순히 보안 규칙을 따른 다는 것을 넘어 대외적인 관점에서 금융산업 전반의 안정성과 신뢰성을 확보하는 장치로 작용을 한다. 그래서 감독기관의 감사 시에도 이 부분은 엄격한 잣대로 세밀히 점검을 하곤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나라의 금융권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물게 개인 전산 장비에 대해 망분리(네트워크의 물리적인 분리)를 의무화하고 있다.


일선 현업 팀의 경우 업무망(내부망)과 인터넷망(외부망)이 분리되어 있고 망연계 솔루션이 이 두 개의 망을 연결해 주는 방식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처음 사용하는 팀원들은 이러한 구조에 적응하는데 많은 불편을 호소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터넷망을 통해 수신된 외부 메일(거래처, 개인 메일 등)이나 파일을 업무망으로 가져오기 위해서는 망연계를 거쳐야 하고, 여기에는 책임자의 결재를 득하는 절차도 있어 개인적인 문서의 경우 매우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다수의 팀원들은 사적인 자료는 업무망으로 가져오지 않는다.

어쩌면 이런 결과를 의도해서 수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IT팀은 한술 더 떠 여기에다가 시스템망(개발망)이 또 하나 있는데 이 시스템망을 통해서만 서버나 데이터베이스 등 전산 인프라에 접근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시스템망의 개인 장비는 이동이 용이한 노트북은 절대 허용되지 않고, 데스크톱 PC와 같이 어느 정도 사용자의 자유로운 이동이 어렵도록 제약을 둘 수 있는 장비만 허용이 된다.


이러한 망분리의 기본 구상은 해킹·피싱 메일을 통해서 내부 전산망에 침투하는 것을 막아보자는 취지인데 팀원의 입장에서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이 3개의 망을 쉽게 전환하기 위해 사용되는 물리적 장비인 스위치가 망전환을 도와주게 되는데, 스위치의 물리적 버튼을 1번, 2번, 3번 눌러가며 망전환을 하다 보면 내가 현재 위치한 망을 혼돈하기 일쑤다. 그래서 어떤 팀원은 배경화면 한가운데 '업무망', '시스템망', '인터넷망'이라고 구분이 쉽도록 큼지막하게 써두곤 한다.




검토할 데이터와 보고 건이 많은 그날 오후 망전환 스위치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기기가 먹통이 되어버렸다. 내가 좀 전까지 잘 사용 중이었던 키보드는 물론이고 마우스까지 반응하지 않는 그 상황이 너무나 답답할 뿐이었다.


PC에 설치된 10여 개의 보안 프로그램과 망전환 스위치의 충돌이 의심되었다. 스위치를 경유하지 않고 직접 PC에 연결하는 식으로 긴급하게 조치를 했지만, 주변기기를 여기저기 옮겨가며 사용하는데 너무나 번거로웠다. 금세 내가 감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기분이었다.


"망전환 스위치에 연결된 키보드가 반응이 없네요.

원인을 빨리 찾아야겠습니다."


새로운 버그를 찾은 듯 들뜬 목소리로 한편으로는 답답한 마음에 나는 담당 팀의 책임자에게 연락을 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비슷한 내용으로 연락을 받아서 제조사와 원인을 찾고 있는데 쉽게 조치가 안되고 있습니다."


아니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문제이고 내가 처음이 아니라는 건가.

사실 이 상황이 못마땅했지만 난 나의 문제를 빨리 해결해서 밀린 업무를 처리해야 했고 지금 나와 대화중인 책임자가 현재로서는 해답을 쥐고 있는 유일한 구세주임에는 분명했다.


"우선 스위치와 케이블을 교체해 드리겠습니다.

다른 분들도 비슷한 방법으로 조치가 되었습니다.

제가 조치가 가능한 인력을 즉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보니 망전환 스위치를 덩굴처럼 에워싸고 있는 케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정리했는지 먼지도 잔뜩 쌓여 있는 것이 보기에도 민망했다. 내가 너무 관리를 소홀히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20분쯤 지났을까 낯선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직감적으로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왔다는 생각에 너무나 반가웠다. 약간은 닳아 해진 가방에서 묵직한 장비와 케이블을 꺼내는 모습이 숙련되고 노련한 느낌이 들었다. 능숙하게 나의 스위치와 케이블을 교체하고 이것저것 점검을 하고 나니 드디어 주변기기들이 작동을 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밀린 업무를 평소처럼 다시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해결되었습니다.

더우신데 고생 많으셨습니다."


사실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만큼 똑같은 상황이 반복될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다행히 그날 이후로 같은 증상은 보이지 않고 있다.


달라진 것은 그날 이후부터 내가 주변을 정돈하는 습관이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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