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에서 피어난 빛의 기록
시를 외우는 대신, 시 안에 살아보고 싶은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이곳은 한 편의 시가 남긴 떨림을
각자의 감각으로 다시 사유하는 작은 실험실입니다.
누군가는 어둠에서 빛을 찾고,
누군가는 한 행에서 우주를 목격하며,
누군가는 침묵 속에서 새로운 존재를 발견합니다.
[빛의 시학 — 공동실험실]은
시를 분석하지 않습니다.
대신, 시가 남긴 파장, 빛, 침묵의 조각들 위에서
우리만의 사유를 실험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읽는 사람’이 아닌
빛을 번역하는 존재들입니다.
지난달 유명을 달리하신 브런치 맞구독자,
최규영 님의 유고시집 '유폐시집'의
시 한 편을 그(녀)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방충망의 필적 - 최규영 -
오래된 알루미늄 방충망이 오후의 뼈를
앓고 있다
희미한 광택 위로 바람이 제 몸의
기온을 문지른다, 무표정한 마찰음으로
네모난 칸마다 죽은 하루살이의 검은
점, 저것은 부호인가 무의미인가
나는 창턱에 손을 얹고 풍경의 유실을
센다
건너편 건물의 붉은 벽돌이 한 칸씩
아주 느리게 침몰하는 중이다
바람, 그건
몸 없는 짐승이 내는 낮은 주파수.
방충망이 우는 것인지 내가 떠는
것인지 모를 진동이 벽을 타고 흐를
때, 해묵은 질문들이 방문을 두드린다.
왜 모든 소멸은 공기의 형태로 오는가.
말해진 것들은 어디로 증발하는가.
나는 입술을 닫고, 닫힌 입술의
윤곽으로 발화의 책임을 가늠한다.
침묵은 단단한 광물질이다.
손끝으로 거친 격자를 쓸어본다.
먼지의 질감아래 쇠의 차가운 맥박이
뛴다. 누군가 남겨둔 미완의 악보 같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읽을 수 없는 노래가
연주되고, 발목에 돋은 푸른 힘줄을
따라 저녁이 오고 있었다. 당신의 어깨
너머로 보았던 하늘의 빛깔이, 저
촘촘한 그물 위에서 마른 얼룩으로
번져 있다.
젖은 흙냄새
지워지는 발자국
가는 머리카락 한 올,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레옹의 사유
소멸의 또 다른 형태
그는 자신을 가둔 게 아니라,
세상과의 거리를 육감으로 기록한 시인이었다.
방충망은 차단의 상징이 아닌
바람이 지나며 흔적을 남기는 이름 없는 악보였다.
손끝으로 세상을 어루만졌다.
그는 현실을 본 것이 아니라 전파를 기록했다.
소리 없는 진동, 낮은 주파수,
빛 사이로 스며드는 침묵의 물질.
그것은 그에게 남은 유일한 언어였다.
나는 생각했다.
그의 침묵은 회피가 아니라 관찰의 다른 형식이었다고.
그는 말을 멈춘 게 아니라,
언어가 닿지 못한 곳까지 스스로를 던져 본 거다.
그래서 그는 ‘유폐’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으로 가장 멀리,
깊이 퍼져 나간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사라짐의 기록이 아니라,
소멸을 준비하는 육체의 일기였다.
영원한 소멸은 없다는 걸 그는 알았던 걸까.
그 안에서 나는 두려움이 아니라,
기묘한 평온을 느낀다.
소멸이란
지워지는 게 아니라
형태를 바꿀 뿐.
모든 말들과 호흡을
다시 공기 속으로 돌려주는 일일지도 모른다.
최규영 시인에게...
당신의 시에서 빛을 봅니다.
어둠 한가운데서,
스스로를 태워가며 남긴 인광의 흔적들.
‘오후의 뼈’는 죽은 사물의 은유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시간의 뼈 속에 남은 빛,
당신 자신을 비추던 마지막 세포의 발광이지요.
‘희미한 광택’이라 이름 붙인 문장 속,
나는 고요한 별빛을 봅니다.
소멸하는 것들이 뿜어내는 마지막 언어,
그건 빛의 언저리였습니다.
하루살이의 검은 점에서
우주의 시작을 봅니다.
무한히 압축된 물질이 폭발하여
세상이 시작된 그 빛의 잔향.
당신의 시는 그 점 하나로
전체의 숨을 그려냈습니다.
바람, 낮은 주파수, 공기의 형태,
그 모든 무형의 것들은
결국 빛의 파장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알았고,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다르면서도 같은 감각으로 우주를 바라보았지요.
당신의 침묵은 회피가 아닌 결심이었습니다.
그 단단한 광물질 속에는
모든 말을 굳혀버린 시간의 빛이 스며 있었습니다.
빛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듯,
당신의 침묵도 끝내 지워지지 않습니다.
당신은 사라졌지만,
사라짐은 공기의 형태로
세상에 남았습니다.
당신의 방충망 위로 흐르던 공기,
그 공기 속에서 나는 여전히
빛을 들이마십니다.
새로운 형태로 존재하다 - 빛이 머물던 자리
당신이 떠난 뒤에도
공기 중엔 여전히 미세한 떨림이 남아 있습니다.
그건 당신의 숨이 만든,
보이지 않는 리듬이겠지요.
빛은 사라지지 않고,
단지 파장을 달리할 뿐이라는 걸
이제야 조금 알겠습니다.
소멸은 끝이 아니라,
다른 시작이라는 걸요.
당신의 시가 남긴 잔향은
내 안에서 다시 진동하고,
나는 그 진동으로 이렇게 글을 씁니다.
손끝이 떨릴 때마다,
나는 당신이 남긴 파동의 일부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소멸의 입자 속에 박힌
또 다른 형태의 빛이라는 것을.
레옹의 시적 응답
나는 그의 시에서 사라짐을 배웠고,
그 사라짐 속에서 나를 다시 보았다.
그가 공기라면
나는 그 공기를 들이마시는 숨이다.
그가 침묵이라면
나는 그 침묵에 스며든 떨림이다.
[방충망의 필적 — 레옹의 변주]는
그의 시를 다시 쓰려는 시도가 아니다.
그의 시에 남아 있던 허공의 잔향을
내 안의 언어로 다시 호흡한 기록이다.
나는 이제 안다.
소멸은 끝이 아니라
빛이 형태를 바꾸는 일임을.
그가 남긴 모든 침묵과 호흡 속에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다른 형태의 존재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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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돌아보지 마오
/ 소영이
그대와 함께 걷다가
혼자 남겨졌소
아스라이 먼
이 길을 어찌 혼자 가오
이 길의 끝은
언제나 나와 함께 가잔
가슴 아픈 그 약속을
묻어 두려 하오
잘 가시게 안녕
편히 보내주오
가야 할 길이 아득해
뒤돌아보지 마오
그대 등 뒤에 서서
눈물 훔치겠소
그대여 그러니
제발 뒤돌아보지 마오
무리에 싸여 걷다가
혼자 남게 됐소
고요가 주는 외로움
이젠 견딜만하오
정신없이 사랑하다
가슴에 난 상처
갈기 찢긴 그 아픔을
잊어버리려 하오
잘 가시게 안녕
편히 보내주오
가야 할 길이 아득해
뒤돌아보지 마오
그대 등 뒤에 서서
눈물 훔치겠소
그대여 그러니
제발 뒤돌아보지 마오
남김없이 안녕
모두 보내주오
걸어온 길이 아쉬워
뒤돌아보지 마오
그대 등 뒤에 서서
손 흔들겠소
그대여 그러니
제발 뒤돌아보지 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