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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부자의 소박한 호사 - 배 타고 제주도

by 시간부자

어릴 때 TV에서 밤배를 타고 제주도 가는 여행기를 본 후로 '배 타고 제주 가기'를 로망으로 품어 왔다. 이후 안타까운 세월호 사건으로 인천 - 제주 배편이 끊겼다가, 재개되었다가, 이용객이 적어서 다시 끊겼다고 들었다.


2025년 여름 기준, 배를 타고 제주에 가려면 완도, 진도, 목포 중 한 곳에서 배를 타야 한다. 우리가 선택한 완도항에서 제주까지는 배로 2시간 40분밖에 안 걸리는데, 광명 우리 집에서 완도항까지 5시간이 넘게 걸린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그렇게 긴 시간 차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아 도전할 엄두도 못 내다가, 남매가 초2 초4가 된 올해 여름 드디어 배 타고 제주 가기 로망을 실현했다.


단번에 완도항까지 5시간을 넘게 달리는 것은 어른들에게도 고된 일이어서, 중간에 전주 친정에 들러 하루 자고 다음날 아침 완도로 출발하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아이들과 나는 시간이 조금 더 생겨서 이틀 먼저 전주로 내려왔고, 금요일 밤에 근무를 마치고 남편이 전주로 합류했다.


토요일 아침 9시 30분, 두근두근 전주를 출발해서 완도로 차를 몰았다. 광명에서 전주로 내려올 때 평일이라 길이 막히지 않아 차로 2시간 반이 걸렸는데, 전주에서 완도까지 3시간이 넘게 걸리니, 새삼 완도가 참 먼 곳이구나 실감 났다. 완도 가는 차에서 창밖으로 '월출산'을 처음 보았는데, 멀리서부터 산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뾰족뾰족한 산의 모양새가 특출 났다. 달 뜨는 밤에 봤으면 진짜 굉장했겠다 등의 이야기로 지루함을 달래며 1시에 완도항에 도착했다.


완도 여객선 터미널에서 샌드위치로 간단히 점심을 먹고, 항구 주변을 산책하고, 2시에 배에 올라 3시 출항 전까지 1시간을 기다렸다. 우리는 2등석 지정 자리가 있는 의자석. 큰 창문 밖으로 넓은 바다가 잘 보이는 자리다. 부웅 설레는 기적 소리가 한 번 들리더니 드디어 출항. 우리가 탄 배의 이름은 실버클라우드호. 배가 컸고, 사람도 많았다. 실내는 넓었고 에어컨을 틀어 시원했다. 배에는 실외에서 바다를 보는 공간이 있었다. 햇빛이 뜨거웠지만 강한 바람 덕분에 많이 덥지 않았다. 아이들과 실외에서 강한 바람을 맞으며 넓은 바다를 한동안 바라보던 평화로운 시간은 오래 기억될 것 같다. 배에서 컵라면을 먹겠다는 로망도 실현했다. 잔잔한 파도에도 배는 조금 출렁였고 나는 가벼운 멀미를 했다. 그마저도 로망의 일부라 여겨져서 싫지 않았다.



3시에 완도를 출발한 배는 5시 40분에 제주항에 도착했고, 우리 차의 출차 순서를 기다려 배에서 내리니 6시가 넘었다. 차의 전기가 부족해서 항구 가까운 고깃집에서 제주산 석갈비로 저녁을 먹으며 차도 충전을 시켰다. 저녁을 먹고 제주 동쪽 섭지코지 쪽으로 차를 달려 숙소에 도착하니 저녁 8시 20분.


전주 친정집에서 아침 9시 반에 출발해 제주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11시간이 걸렸다. 배에 사람과 차를 싣는 요금은 28만 원이었다. 4인 가족 항공권에 차 렌트비를 합친 것에 비해 훨씬 저렴하지만 시간은 오래 걸렸다. 시간이 오래 걸려 지루할 수도 있었지만, 과정 자체를 즐겼기 때문에 고되긴 했어도 크게 지루하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수입은 줄었지만 시간이 더 많아진 시간부자가 되었기에 선택할 수 있었던 옵션이었다. 나의 로망을 함께 이뤄준 가족에게 더욱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제주에서의 여유로운 시간을 즐겨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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