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부자의 소박한 호사
"어른은 어린 시절 부모에게 그토록 받고자 했던 그것을 스스로에게 주는 사람."
공지영 작가의 '딸에게 주는 레시피'라는 책에 있던 글귀였다. 인상 깊은 문장이라 노트에 필사를 해두고 여러 번 들여다보았다.
'부모에게 받고자 했으나 받지 못했던 것'을 스스로에게 주는 것이 어른이라면, 어른으로서 지금 나에게 무엇을 해주고 싶은가? 나는 크게 바라던 게 없던 어린이였어서 한동안 답을 찾지 못했었는데, 나에게는 '배움'이 그 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
어릴 때는 지금처럼 학원이나 방과 후 수업이 다양하지 않아 무얼 배울 수 있는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잘 몰랐다. 유일하게 배웠던 예체능이 피아노였다. 한창 피아노를 재밌게 배우고 있었는데, 내 의지와 무관하게 엄마가 학원을 그만 다니라고 했다. 계속 피아노를 다니고 싶다고 조르는 나에게 엄마는 "전공할 것이 아니니, 이 정도면 됐다."라고 딱 잘라 말했다. 아마 그때 형편이 좋지 않았거나, 진짜 더 배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신 것이리라. 어릴 때 기억이 거의 남아 있지 않는데도, 엄마의 이 대답이 유독 뇌리에 콕 박혀 있는 것을 보니, 재미를 붙여가던 피아노를 타의로 그만둔 것이 꽤 마음에 사무쳤던 것 같다.
그래서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기어이 집 근처 피아노 학원을 한 달 다녔다. 그런데 그때는 이미 내 손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 마음을 따라오지 못하는 손가락 때문에 혈압이 올랐다. 그리고 어린이 학생들이 내 연습실을 기웃거려서 퍽 부끄러웠다. 어린이들은 소리 내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기웃거림을 '어른인데 저렇게 못 치다니~~'로 해석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열등감에 가득 찬 편협한 해석이지만(그냥 어른이 학원에 온다는 것 자체를 신기해했을 수도 있는데), 그때는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 피아노를 계속 이어갈 근성이 없어서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어렸던 20대의 이야기다.
40대의 나는 그때보다 조금 더 성장한 어른이 되었고, 잘하지는 못해도 즐겁게 배움을 지속할 수 있는 마음 근력이 생겼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나 자신을 깨닫고 하나씩 배움을 추가하다 보니, 요즘의 나는 배우느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영어 스터디
오전 주 1회 영어스터디를 2년째 다니고 있다. 한국에서 30년 사신 원어민 선생님이 수업을 이끌어주시고, 동료 스터디원들의 참여도가 높다. 아직도 영어로 말해야 하는 순간이 되면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면서 단어를 찾아 더듬거리지만 그래도 당황하는 정도가 처음보다 많이 나아졌다.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스스로가 기특해서 지속하고 있는 배움이다.
광명자치대학 사회적 경제학과
길거리에 붙은 현수막을 보고 알게 된 광명자치대학. 정규 대학은 아니고 시민대학이다. 무려 20주에 걸쳐 주 1회 두 시간 반씩 수업과 토론이 진행된다. 올해는 다섯 개의 학과가 있었는데, 나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고 사회적 경제학과에 지원했다. 사회적 경제의 정의는 다양했지만 '사회 문제를 비즈니스로 해결'하는 것이라는 설명이 제일 간명하고 와닿았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호의와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비즈니스로 해결하려 하는 것이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면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구조를 만드는 게 핵심이다. 사회적 경제의 역사, 공유경제, 공정무역, 협동조합, 마을기업, 사회적 기업 등에 대해 배우고 있고, 강의를 듣다 보면 '세상에 이런 좋은 일, 멋진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할 수도 있구나' 싶어 놀랍고,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눈뜸으로 늘 마음이 일렁인다.
커피 수업
사회적 경제학과에서 알게 된 선생님이 진행하시는 커피 수업을 최근 수강하게 되었다. 주 1회 오전에 3시간씩 4회간 진행되는 단기 수업이다. 평소에도 좋아하는 커피를 깊게 배울 수 있어 좋다. 매 수업 때마다 세 가지 종류의 다른 '생두'를 직접 로스팅하고 분쇄해서 커피를 내린다. 생두의 모양과 향기를 비교하고, 로스팅 직후의 색과 향, 분쇄 후의 향, 커피를 내린 후의 향과 맛을 비교한다. 원두마다 향기와 모양이 다른 것도 신기하고, 같은 생두로 로스팅한 커피인데도 각 조마다 서로 맛과 향이 다른 것도 신기하고 재미있다. 제각각의 향기를 맡다 보면 수업 말미에는 코와 머리가 어질어질할 정도로 향기의 축제가 펼쳐지는 즐거운 수업이다.
이 밖에 온라인 수업(클래스 101)으로 사진, 인테리어, 공유숙박업, 인스타릴스에 대해 가끔 배우고 있다.
광명자치대학 사회적 경제학과에서 함께 배우고 있는 고령의 동료와 이야기할 일이 있었다. 그분은 전통시장에서 치킨을 튀기며 돈을 제법 벌었는데, 몸을 아끼지 않으며 일한 탓에 심장에 무리가 와서 건강이 크게 상한 후로 일주일에 이틀은 일을 쉬고 본인이 배우고 싶은 것을 배우신다고 한다. 무엇을 배우시는지 여쭤보니 일단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배우는 게 설레서 일찍 일어나신다고) 온라인으로 경공매 강의를 듣고, 노인복지관에서 영상 촬영과 편집에 대해 배우고, 저녁에는 사회적 경제를 배우러 오신다고 했다. 나중에 은퇴한 할아버지들을 파트타임으로 고용하여 어르신 돌봄 기관을 운영하겠다는 꿈이 있으시다고 했고, 지금 배우는 것들은 그 꿈을 위한 초석이라고 하셨다. 대단하신 분이다.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존경스러운 고령 동료와 달리 나는 어떤 목표가 있어서 배우는 것은 아니고 그저 배우는 게 좋아서 배우는 단계지만, 지금 배우고 있는 여러 가지가 모두 어떻게든 미래로 연결될 점(스티브 잡스가 말한 connecting the dots의 dots)이라 생각한다.
"필요해서" 또는 "해야 하니까" 배우는 것에 비해 "배우고 싶어서" 또는 "더 알고 싶어서"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배우는 즐거움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원래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못했던 것을 조금 더 잘하게 되면서 얻는 자아효능감도 있다. 관심을 갖고 조금만 찾아보면 근처에 도서관이나 복지관, 주민센터나 평생학습원 등 공공기관에 저렴한 수업이 다양하게 많이 있다.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학습에 대한 수강료를 다 합쳐도 한 달에 10만 원이 넘지 않는다.
'다 늦게 배워서 뭐 해'라는 주저함 대신 평소 관심이 있었거나 궁금했던 주제에 대해 가벼운 마음으로 수강해 보면 어떨까. 첫 수업에 가기 전까지는 어색하고 주저되고 귀찮고 내가 이걸 왜 신청했을까 후회도 될 테지만,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는 틀림없이 흡족할 것이다. 조금 더 내 마음에 드는 내가 되어 있을 것이다. 배움이 영 본인 취향이 아니라면, "어린 시절에 어른들에게서 받고자 했으나 받지 못했던" 그 즐거움을 자신에게 선물해 주는 어른이 되는 것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