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을 좋아한다. 그것은 끌림이다.
태어난 곳이 산자락이니 내 몸 어딘가에 산 기운이 스며 있는지도 모른다. 달이 둥글게 커지듯 조금씩 기운이 차오르면 연어가 산란지를 기억하여 강을 오르듯 산을 찾곤 한다. 산은 어느 때라도 좋지만 특히 마음을 끄는 것은 가을이 깊어가는 산이다. 나무들이 잎을 내리는 사이사이로 하늘을 담아낼 때 눈을 들어 보면 두 개의 능선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바위와 땅으로 그어진 굵은 실선과 그 선 위로 나무들이 말갈기처럼 늘어서며 만드는 또 하나의 선이 흐른다. 여러 나라의 산들을 가 보았지만 한국의 산만큼 끌림 있는 산은 없다. 웅장함에 감탄하다가도 끝까지 마음을 주진 못하고 경외감이나 어떤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하던 아메리카, 유럽 그리고 중국의 많은 산들, 한 그루의 나무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홀로 웅크리고 선 중동의 산들은 저런 끌림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두 개의 능선 사이로 하늘과 사람의 마음을 담은 산이 겹겹이 달린다. 끌림이 강한 날, 한반도의 중심 태백산맥 한가운데를 지났다. 한강, 낙동강 오대천이 북쪽을 제외한 세 방향으로 갈린다는 태백 삼수령을 출발해 삼척 황장산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한줄기다. 새벽 산행을 시작해 이십여 킬로미터를 지나고 있다. 능선과 주고받던 마음은 이제 흐르는 땀에 잦아들고 걸음은 원초적인 움직임을 닮아간다. 거친 숨과 움찔대는 근육의 움직임이 숲을 흔든다. 바람이 강하다. 늦은 태풍이 남쪽에 상륙한다는데 선발대가 도착한 모양이다. 돌 사이 심어져 돌 위에 자라는 고랭지 채소밭을 지나 이제 정상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능선을 오른다. 발걸음이 무거울수록 머리는 가벼워진다. 걷는 것도 명상이 되는 순간, 누구도 나를 대신 해 걸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꿈결처럼 느낄 때였다. 어떤 강한 기운이 전신을 감싸고 지친 의식이 전기에 감전된 듯 깨어났다.
커다란 나무가 바로 내 위로 쓰러져 내리고 있었다. 위에는 무성한 가지와 잎을 한껏 이고 있는 한 팔 가득한 둘레의 고목이다. 밑둥치 가운데로 허리 높이까지 텅 비어 마치 널빤지 두 개를 세워 놓은 듯한 몸통으로 위태하게 서 있던 나무가 그만 넘어진다. ‘ 피해야 해!’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곁을 지나치고 소스라치게 놀라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아찔한 환상이었다. 바람에 나무가 크게 휘둘리고 있었지만 아직 굳건히 버티고 있었다. 옆으로 이어진 깊은 벼랑에서 바람이 치솟았다. 위에서 휘청대는 가지들은 마치 웃는 듯한데, 벼랑을 등진 두 줄기 밑둥치 그 힘겨움은 비장하기만 했다. 앙상한 다리에 굵은 핏줄이 꿈틀대며 바람을 이겨내고 있었다.
그 순간 왜 아버지가 떠올랐을까? 저렇게 버텨냈으리라. 아버지는 열 손가락을 꼽을 만큼 많은 자식들을 키워가며 일제 말엽에서부터 이어진 한국사의 풍파를 온몸으로 견뎌 내셨다. 세월에 몸은 여위어 가는데 왜 그리 삶의 굴곡은 깊고 바람은 그치지 않았는지…. 텅 빈 가슴에 그 하얀 공간이 커져갈 때 말없이 안고 계셨을 외로움과 비장함을 가늠한다. 당신을 이해하고 싶어 어느 날 어렵게 대화를 청했었지. 기억의 편린들이 낙엽처럼 내리던 오후였다. 남다른 재능을 가졌지만 타협을 거부하고 원칙을 고수하다 오해와 소외를 받기도 했던 삶. 그리고 오랜 시간을 다른 능선에서 보냈다. 내가 미국 유학 중이었던 아버지의 말년 서너 해는 기억에 없고, 돌아가셨을 때도 땅에 묻히신 후에야 찾아 뵐 수 있었다.
‘아… 아버지!’ 당신이 산허리 한 그루 고목으로 앞에 서 계시는군요. 그을린 얼굴이 어른대다 멀어진다. 산허리를 돌아 바람이 잦아든다. 고통도 잊고 나 자신마저 잊은 발걸음이 가을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다시 눈을 들어 보면 멀리 달리는 두 개의 능선, 가까이 느끼면 지친 몸을 잡아주고 마음을 붙들어 주는 고목,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끌림이다. 이제 몇 계단을 오르면 황장산이다.
글/이산은(李山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