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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산은 Feb 07. 2019

생명의 감각에 대한 작은 목소리

삶은 시간의 함수이지만 가만 보면 공간 또한 깊은 영향을 미친다. 인간 시간 공간을 삼간(三間)으로 이름하며 그 관계 속에서 사유하고 살아가는 의미가 그래서 새롭다. 산기슭 시골에 작은 농가주택이 있다. 가끔 들려 집과 나무 그리고 조그만 텃밭을 돌보는데, 신기한 것은 그곳에 가면 전혀 다른 시간을 느끼곤 한다. 공간의 이동인데 마치 시간의 이동처럼 다가온다.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마음도 맥박도 달라진다. 분주한 마음은 나도 모르게 풀리고 휴대폰에서도 자유로워진다. 항상 챙기고 수시로 확인하던 나의 모습은 그 공간에서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만다. 의식하지 않고 휴대폰을 잊고 보낸 시간이 가끔 신기하다. 도시에 비해 변화가 없어 보이는 공간이지만 자세히 보면 수많은 변화가 눈부시다. 어느 순간 성큼 자라고 선머슴 머리처럼 가지를 뻗은 나무들, 아무리 뽑아도 다시 솟는 다양한 종류의 풀에서 생명력은 경이롭기만 하다. 작은 새끼를 달고 다니는 암꿩의 조심스러운 눈동자, 숲 속 공터에서 간간이 뛰노는 노루의 경쾌한 발놀림 모두 생명의 생생한 모습이다.

 

은퇴하고 나이가 들수록 병원 가까이 살아야 한다고들 말한다. 아프면 바로 들릴 수 있는 괜찮은 병원이 가까이 있어야 하고 그래서 도시를 떠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일견 맞는 말이다. 조금만 느낌이 안 좋아도 바로 병원에 들리기로 한다면 그리고 부단히 편리함을 추구해야 한다면 그 주장이 맞을 것이다. 반박하거나 이견을 달 이유가 없다. 한편 그런 주장의 이면도 깊이 생각해 볼 필요는 있다. 그것이 건강한 삶의 논리인가? 뭔가 잃어버리는 것은 없는가? 도시 공간에서 바쁜 몸과 마음은 어느 순간 생명의 감각을 잃어가고, 몇 분 내에 갈 수 있는 병원이 있지 않으면 그만 불안해하는 존재가 되어 간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부하는 우리가 그냥 받아들이기에는 왠지 부끄러운 논리라는 생각이지만 그냥 다수가 수긍하고 좇아 간다. 도시개발과 도시 유인의 중요한 논리의 축으로 견고하게 자리 잡아가고 있는 사이 시골 마을은 빈 집이 하나 둘 늘어간다.  


오히려 병원보다 먼저 생각할 것은 생명으로써 스스로 느끼는 어떤 감각을 회복하는 것은 아닐까? 나를 느끼며 키워가는 감각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물론 응급의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몸이 이상하면 며칠 혹은 몇 주 전에는 느낄 수 있다. 자신을 느끼고 미리 병원에 예약하고 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모습일 것이다. 그런 느낌을 잃어 가는 삶에 질문을 던지는 것이 보다 더 병원 가까이 가는 것보다 경제적이고 가치 있는 접근이다. 작은 식물이나 동물도 상황이나 자기 몸 상태를 미리 인지하며 준비하고 반응한다. 그런 모습들이 나무 한 포기, 뿌리나 열매 곳곳에서 가만 보면 보인다. ‘아하 저런 상처에 반응해서 저렇게 뿌리를 내리고 저 방향으로 가지를 키웠구나!’

 

건강 보험공단의 통계를 보면 치과 진료를 제외하고 병원을 찾는 빈도는 우리나라가 1인당 평균 17회로 가장 많다고 한다. OECD 국가 평균은 6.9회라고 하니 10회 이상 더 찾는 것인데 대단한 수치다. 5,000만 인구라면 연간 5억 회를 더 가는 것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나친 병원 의존이다. 응급실 이용 빈도나 입원 일수 비교에서도 단연 우리나라가 1위다. 물론 필요한 경우 편리하게 이용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지나친 의존은 생명이 내재한 고유의 감각이나 자연치유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지 않을까? 생물학을 전공해서인지 나는 일정 부분 생명이 느끼는 자기 감각이나 자연치유력에 대한 믿음이 있다. 자기 몸 상태를 스스로 느끼고 인지하며 생명이 가진 자연 치유력에 신뢰를 갖는 것인데, 그것은 관심이고 습관이다. 굳이 ‘자연인’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더라도 조금만 염두에 두면 회복할 수 있는 감각이고 생명 스스로 가진 고유한 능력이다. 


도시의 환경이나 바쁜 삶 속에서 우리는 어느 순간 자연과 생명의 감각을 잃거나 잊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지하철 역과 가까운 병원을 강조하며 사람을 모으는 광고는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산되고 있다. 지하로 지상으로 수십 층 수직 도시를 건설하며 병원 가까이 가까이로 사람을 모으며 생생한 생명이 살아 있는 공간은 비워가는 것이 삶이나 사회의 지속 가능한 모습일까? 자연의 일부로써 스스로 느끼는 감각의 회복을 먼저 생각한다. 자연이 짓는 공간에서 생명의 감각을 키우고 가치를 돌아보는 목소리는 현란하게 광고할 수 없고 언제나 작다.  크지 않아도 음미해 볼 목소리가 있다.    

                                                                                                                                         Feb 2019

이 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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