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프레임에서 자유로운가
중요한 사안에서 나를 돌아본다
한 사안에 대해서 우리는 다양한 각도에서 서로 다른 깊이와 폭을 가지고 본다. 사람마다 다른 견해를 갖는 것인데, 필요한 사실 관계를 밝힌 탄탄한 견해는 다양할수록 새로운 시각을 더해 주고 사고를 풍요롭게 한다. 그것이 다양성의 가치다. 한편, 적절한 배경이나 사실관계를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주장하거나 혹은 사실관계를 왜곡한 견해나 주장은 다양성의 가치와는 거리가 멀고 혼선과 혼란을 야기한다. 통합적으로 보며 사실관계에 대한 왜곡이 없는 깊이와 폭이 느껴지는 견해나 주장이 아쉬운 때다.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일단 주장부터 하고 보는 피상적인 견해들이 어두운 밤 네온사인처럼 명멸하는 시대다.
일제 치하 징용 피해자에 대한 한국 법원의 사법적인 판단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무역 전쟁을 진행하고 있다. 정치적인 의도를 담고 집요하게 이루어지는 양상인데 국제 교역은 물론 정치, 안보, 사회 등 여러 면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파장이 큰 만큼 사안을 보는 견해나 주장 또한 다양하다. 중요한 사안이기에 다양한 시각에서 보고 의견을 공유하는 자체는 필요하고 의미가 있다고 보는데, 사실 관계를 나름대로 정리하며 전후 맥락을 가지고 사안에 대한 이해나 시각을 열어주는 탄탄한 견해보다 사실관계를 무시한 의견이나 주장이 난무하는 모습이다.
왜 그럴까? 어떤 견해를 가질 때 대부분 자기의 프레임 즉 자기 안경을 가지고 본다. 프레임은 복잡한 사안도 단순화해서 쉽게 이해하는 장점이 있지만 한편 사실관계를 왜곡하거나 오류를 인식하지 못하고 판단하는 단점도 있다. 프레임 안에서 보면 사실의 진위여부는 2차적인 요소가 되기 쉽다. 분석하거나 깊이 이해하지 않고 자기 프레임으로 보기에 쉽게 주장할 수 있지만 그 견해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거나 본질을 왜곡시키기도 한다. SNS와 모바일에 의한 초 연결의 시대, 한 견해는 개인에 머물지 않고 의도적이든 아니든 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견해를 구성하는 사실관계에 대한 기본 점검이나 논리적 비약에 대한 자기 검열이 필요한 이유다. 개인이라도 그렇고 언론이라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최근의 한일 무역갈등을 판단하는 중요한 몇 가지는 1) 식민지배에 대한 양국의 견해, 2) 65년 한일 협정으로 국가가 받은 돈의 의미와 국가 간 협정에 의해 개인의 청구권이 상실되는지에 대한 사법적 판단, 3) 당시 전범 기업에게 배상을 하라는 판결에 대해 일본 국가가 나서서 보복하는 행위에 대한 판단 등이다.
첫째, 식민지배에 대하여 우리는 그것을 불법적인 침략과 침탈로 보는 반면 일본 우익 정권은 협정에 의한 것이고 불법이 아니라는 시각이다. 한일 합방 전후의 사건들, 명성왕후 시해, 영친왕 볼모, 매국노와의 암약, 3.1 운동이나 독립운동 등 일련의 과정을 떠올려 보면 일본의 계략과 협박 그리고 강압에 의한 침략 행위임이 분명함에도 일본 우익 지배층의 시각은 견고하다. 한편, 19-20세기 일어났던 다양한 식민지배에 대하여 일본처럼 국가차원의 사죄나 사과를 하지 않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기 어려운 행위이기도 하다. 반성이 없다는 것은 언제라도 유사한 행위를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둘째, 한일 협정으로 당시 한국 정부가 받은 돈은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 돈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었다는 일본의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배상이었다고 주장해도 사법적인 면에서 보면 개인의 청구권을 국가가 대신할 수 없다는 것이 국제법의 견해라고 한다. 셋째, 우리 법원의 판결 또한 국가의 배상 아닌 전범 기업에 대한 배상 판결임에도 일본의 우익정권은 국가가 나서고 있다. 일본 회사의 불법 행위에 대한 사법적인 배상 판결에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데, 삼권분립의 원칙하에서 한국 정부가 사법부 판결에 영향 할 수 없다는 점은 일고의 고려도 없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형국이다.
내가 대략 이해하는 맥락은 이러한데, 이에 대한 반론이나 고려해야 할 다른 요소가 더 있는지 또는 요소 간 인과관계 등은 토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관계에 대한 이해와 판단을 가지고 견해를 피력하고 주장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접근은 단순히 사안에 대한 정의나 규정을 하는 것에서 나아가 합리적 대응 방안을 모색하는 데에도 중요하다. 그런 요소와 형식을 갖추었을 때 다양성을 더하는 견해이고 주장이 될 수 있다.
아쉽게도 많은 기사나 SNS 글이나 견해가 일방적인 주장으로 일관하는 것들이 많다. 어떤 프레임에 갇힌 모습이란 느낌인데, 프레임으로 사안을 보면 그 사안을 제대로 보기는 어렵다. 짙은 선글라스를 끼고 보면 맑은 날도 곧 비가 올 것 같아 보인다. 프레임에 갇혀 주장의 맥락을 구성하는 사실관계를 무시하거나 심지어 왜곡하여 주장한다면 다양성을 더하는 의견으로써 가치는 없다. 사안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바람직한 대응 전략을 마련하는데 혼선과 혼란을 줄 뿐이다.
관련 견해로 우리 정부가 자존심을 내세울 일이 아니란 충고의 글을 보았다. 직접 연관성 없는 몇 가지 내용을 장식처럼 붙이고 있지만 사안의 주요 맥락에 대한 사실관계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나름의 프레임을 가지고 정당화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안의 맥락을 보면 자존심의 문제로 풀어갈 정도로 단순한 사안이 아니지 않은가? 자존심의 문제로 정의하고자 한다면 위의 맥락을 뒤집을 새로운 요소나 인과관계가 제시되어야 타당할 것이다. 불매운동을 반대하는 인터넷 주장도 읽어보면 사실 관계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거나 주장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불매운동에 대한 찬성 주장은 자체로 의미가 완결되지만, 반대 주장은 반대 이유는 1차적인 것이고 나름의 대안이 제시되어야 주장으로써 의미가 있을 것이다. 상기 맥락이 적절하다면 일본 우익정권의 적반하장식 무역규제다. 상대가 때린다면 무엇이든 해야 한다. 같이 때리지는 않더라도 인상착의를 기억해 신고를 하거나 소리라도 쳐야 하지 않을까? 일본 제품 불매 운동이 효과 없다거나 하지 말자는 주장은 할 수 있겠지만, 그 이유를 나열하는 것만으로는 의미가 없고 대안을 함께 제시할 때 주장으로 완결되고 가치가 있다고 본다.
한편, 두리뭉실한 대안 또한 경계한다. 많은 주장들이 ‘지혜롭게, 합리적으로, 혹은 전략적으로 해야 한다’ 등으로 맺는데 대안은 아니다. 그런 말들은 ‘잘해야 한다, 잘해 보라’는 상투적인 언급과 다름없다. 당장 특사를 보내자는 안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상대의 의중을 바로 알고 어떤 대응 방향이 설정되어야 특사도 의미 있지 않을까? 여러 채널을 통해 대화 제의에도 일본은 회피하는 상황인데 특사를 보낸다 한들 망신 사기 좋은 시점이다. 한편, 특사 관련하여 한 일본 인사가 ‘언제까지 일본에 와야 한다’는 보도가 있는데, 그 진위 여부는 잘 모르겠으나 대단히 오만한 언사다. 외교에는 문외한이지만 특사를 교류한다면 적절한 모양이나 격식 그리고 내용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형식이 갖춰져야 할 것이고 적절한 타이밍과 면밀한 시나리오가 필요할 것이다.
최근 친구들 대화방에서 한일 관계에 대한 견해를 나눈 적이 있다. 의견이 분분한 즈음 이제 정치적인 이야기는 삼가 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해야 한다고 본다. 피하는 것은 쉬운 하나의 방식이겠으나 적극적으로 다양한 자기 의견을 나누는 것은 중요한 사안에 필요하고 의미가 있다고 본다. 견해가 달라도 친구는 친구일 것,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고 의견을 모아가야 할 사안이다. 다만, 프레임적인 의견이 아니라 나름대로 파악한 사실관계에 기반한 의견이어야 의미가 있다. 다양성을 살려가는 논쟁의 의미와 새로움이 거기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한 삶의 과제다. 바쁜 일상에서 모든 사안을 신중하게 볼 수는 없고 볼 필요도 없겠지만, 중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신의 프레임을 벗고 자유롭게 볼 수 있다면 보다 건강한 견해로 효과적인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시대를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고 지혜로운 삶이지 않을까? 자신의 프레임을 인지하면서 때때로 프레임을 의도적으로 벗어나 판단해 보는 것이며, 관성적으로 보지 않고 의식을 깨워서 보는 것이다. 사안 자체와 맥락 위주로 볼 때 감춰진 새로움과 즐거움이 드러나고 더 균형 잡힌 견해를 가질 수 있다. 첨예한 한일 갈등, 나는 지금 내 프레임으로 보고 있는가 사안 자체로 깨어 보고 있는가?
2019 7월 28일
이 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