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시대, 깨어있는 사람이 희망이다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와 유족께 깊은 슬픔을 나눕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을까? 이태원 참사의 충격이 가슴을 답답하게 누르며 여전히 무겁게 남아 있다. 희생자나 유족에 관한 기사는 안타깝기만 하고 책임을 지거나 원인을 규명해야 할 사람들의 변명이나 가벼운 언행, 드러나는 부실대응에는 분노가 더한다. 가벼운 호기심과 들뜬 마음으로 찾은 번화한 도시의 한 가운데에서 발생한 참사다. 너무나 허탈하고 참담한 비극이다. 그 원인에 대하여 경찰이 감찰과 수사를 한다고 하지만 참사 원인이 되었거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변명하기 바쁘고 여전히 권력 핵심에 건재한 상황에서 하부조직인 경찰이 어떤 진실을 밝혀 낼 수 있을까? 소란스럽게 주변 덤불만 헤치며 정작 본질에는 한 발도 다가서지 못할 수도 있다는 염려는 기우일까? 그러나 충격이 큰 만큼 우리의 눈과 의식은 생생히 살아있다. 얄팍한 논리로 여론을 호도하거나 무마하며 상황을 모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156명의 젊은이가 안타까운 희생을 당했다. 197명의 부상자까지 합하면 353명 꽃다운 삶이 친구나 가족들과 찾은 길거리에서 죽음과 고통에 내몰린 것이다. 우리나라는 물론 다양한 국적의 희생자들에 대한 안타까운 기사를 본다. 타국에서 자녀를 잃은 부모의 허망함이나 조금전까지 정겨운 문자를 주고받던 수많은 희생자 유족의 아픔을 어찌 가늠할 수 있을까? 주변에도 안타까운 희생자는 있었다. 친구 형의 가족인데 결혼을 앞두고 추억을 위해 이태원을 찾은 예비 부부라고 한다. 시골에서 올라온 친구에게 서울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찾은 젊은이도 있다. 추억 나들이가 생이별의 비극이 되었다.
왜 그곳에 갔느냐고 왜 가는 걸 부모가 막지 못했느냐고 놀다가 죽은 걸 국가가 왜 애도하냐고.. 장소를 폄하하고 피해자를 비난하는 주장들은 참 어이없고 혐오스럽다. 이태원은 가서는 안될 특수 공간이 아니다. 그곳은 많은 사람들의 주거와 사업의 공간이며 다양한 사람들이 찾는 익히 알려진 공간이다. 한국을 방문하는 많은 외국 방문객이나 관광객들도 들려야 할 명소의 하나로 손꼽는 곳이다. 외국인들이 많이 거주하거나 찾는 장소이며 젊은이들이 넘치고 활력이 느껴지는 곳을 찾은 피해자나 방문자의 자연스러운 호기심을 그렇게 욕보일 수 있는가? 오래전 동료 네댓이서 이태원을 찾은 적이 있다. 근처에서 회의를 마치고 이국적인 분위기에서 맥주 한 잔 하겠다고 찾았는데, 인파가 많고 비싸고 소란스러워 한시간쯤 머물다가 에밀레 종 같은 작은 기념품을 하나 사 들고 온 기억이 있다. 대학로처럼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곳, 서울의 한 관광지를 찾은 피해자들을 그렇게 비난하는 것은 참 잔인한 폭력이다.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은 공감과 연민이다. 사람이기를 포기한 인면수심 언행에 아연하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폭력인가? 감춰진 책임자들을 옹호하려는 왜곡되고 피폐한 심성만이 보일 뿐이다.
'관련법이 미비하고 대응매뉴얼이 없다'거나 ‘행사 주체가 없다’는 프레임은 더욱 기괴한 말장난이다. 법과 매뉴얼에 참사 책임을 돌리며 희생자를 되려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치졸한 변명이다. 빗발치는 112 신고에 대한 부실 대응도 매뉴얼 탓인가? 수백만명이 참여한 월드컵 응원이나 구정이나 추석명절 대이동은 과연 뚜렷한 행사 주체가 있어서 그러한 참사 없이 안전했는가? 이태원 할로윈 파티는 매년 있었고 올해보다 더 많은 인파가 몰린 해도 있었지만 지금까지 이처럼 참담한 비극은 없었다. 법이나 매뉴얼 그리고 행사주체로 대중의 관심을 돌리며 변명하기 보다 국민의 안전을 담당하는 시스템이 ‘지금까지 작동했는데 왜 2022년 10월 29일 작동하지 않았는지’를 먼저 묻고 찾아야 진정성이 있고 책임 있는 모습이다. 사람의 잘못을 제도에 떠 넘기려는 시도는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사람이다. 국가, 행안부, 법무부, 해당 지자체 그리고 경찰의 리더십이다.
대통령의 낮은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초점을 ‘마약과의 전쟁’으로 삼고 이태원 할로윈데이에 획기적인 결과를 노리려 기획했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위해 교통경찰이나 경찰 기동대 대신 사복차림의 마약전담 경찰을 이태원에 다수 배치했다고 한다. 마약 퇴치는 참 중요한 과제이지만 이벤트화 할 사안은 전혀 아니며 사람의 안전을 희생시킨 이벤트화는 더욱 아니지 않는가? 결론이 나지 않았기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정복 차림으로 눈에 띄는 경찰 수를 최소로 했고 사복 차림의 마약 단속 경찰 위주로 투입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만약 그러한 이벤트화가 대통령실, 법무부, 행안부 그리고 경찰 수뇌부가 교감해서 기획한 것이라면 현장에서 빗발친 112신고나 기동대 파견 요청에 대응할 권한은 누구에게 있을까? 이벤트를 기획한 수뇌부 외에는 없다. 수뇌부 외에는 누구도 그 계획에 섣불리 끼어들 수 없다. 중간 단계에서는 그것을 거스를 힘이 없다는 것인데, 예기치 않은 긴급 상황 발생시 능동적인 초기대응을 할 수 없는 구조적인 무능의 블랙홀이 생긴다. 용산경찰서장, 서울경찰청장, 112 종합상황실 관리관, 경찰청장, 용산구청장, 서울시장 등은 응분의 책임을 져야겠지만 중간단계에 있다. 대부분 골든 타임의 행적이 모호하고 조금씩 밝혀지는 모습도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분명 직무유기를 한 것이지만 극적인 이벤트를 위해 직무유기를 강제당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보고체계의 최상위인 대통령실과 대통령이 행안장관이나 경찰청장 보다 참사를 먼저 인지하고 역으로 확인하려 했다는 것이나 경찰서장 아닌 소방서장이 고군분투하며 초기현장을 주도했다는 것도 상식적이지 않다. 뭔가 왜곡돼 있다. 일반적인 사고라면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마약과의 전쟁은 매우 중요하지만 상시적이고 체계적인 시도로 마약 유통의 상부를 겨냥해야 맞고 기획을 하려면 그런 과감한 기획을 해야 한다. 할로윈데이에 이태원에서 말단의 공급책이나 이용자를 대상으로 마약퇴치를 시도하고 성과를 생색 내려는 것은 사회를 밝히는 횃불이 아니라 반짝 스러질 불꽃놀이를 기획하는 것에 다름 없다. 사실이라면 참으로 한심한 일이고 지지율을 높이는 수단이나 기회로 접근했다면 그런 협잡과 기만이 두렵기도 하다. 눈을 현혹하는 불꽃놀이를 위해 이태원 방문객이나 젊은이의 안전은 안중에 없었고 그렇게 그들은 처참히 쓰러졌다면 과연 누구의 책임인가?
애도할 시간이기에 책임을 거론하지 말고 애도만 하자는 일부의 말은 그럴 듯하지만 희생자나 유족 그리고 국민을 얕잡아 보는 불쾌한 언사다. 애도 역시 이벤트화 하며 상황을 물타기 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아닐까? 분명한 책임 소재를 밝혀서 책임질 사람들이 응분의 책임을 지고 재발을 방지하는 계기로 삼는 것이 희생자에 대한 진정한 애도다. 시민의 순수하고 자발적이고 진정한 애도는 피해자나 유족에게 큰 위안이 되고 커다란 슬픔을 나누는 우리의 모습이지만, '참사'를 '사건'으로 '희생자'를 '사망자'로 표현하도록 지침을 내리고, 애도기간을 정해 애도를 강요하며 다른 어떤 책임 논의나 질문도 거부하는 행태에는 애도의 진정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기획한 애도는 '할만큼 했다'란 얄팍한 명분은 줄 수 있겠지만 참사에 대한 대중의 피로도를 높이거나 관심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한편 애도 기간에 증거를 은폐하고 진실을 덮으려는 시도는 큰 사건에서 언제나 발생한다. 이처럼 대통령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권력 핵심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큰 사건은 더욱 그렇다. 초기에 증거나 정황자료를 온전히 확보해야 한다. 어이없고 처참하게 생을 달리한 희생자나 유족의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달래는 것은 철저하게 진실과 책임을 규명하고 분명히 개선하는 것이다. 말로 하는 애도나 검은 옷의 사진을 언론에 노출하는 식의 애도가 아니라 반성하고 개선하며 그 희생을 헛되지 않게 만드는 것이 바른 애도다.
윤석열 정부는 공약이행이라며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전격 이전했다. 용산으로 이전이라는 방향이 설령 맞다 해도 적절한 과정이 필요하고 체계적인 준비가 뒷받침되어야 마땅한 사안이다. 전혀 작지 않은 변화다. 단순한 주거나 집무실 변화가 아니라 국가를 대표하는 공간이며 국제교류는 물론 다른 모든 정부 부처와 원활한 소통 그리고 안전과 안보 시스템이 갖춰져야 할 공간이다. 개인이 집이나 사무실을 이사하는 데에도 최소 수개월 이상 고민하고 계획을 세운다. 국가 대사임이 분명한데도 정권을 잡고 불과 한달 만에 졸속으로 이전을 하고 보니 드러나거나 드러나지 않는 무수히 많은 부작용이 분명 발생할 것이다. 드러나는 비용도 이미 천문학적이다. 수십년의 시간을 두고 정착한 안전 및 치안 시스템이 구비된 청와대를 무엇에 홀린 듯 덜컥 나왔다. 그렇게 군의 핵심공간과 외교공관을 차지하고 사택에서 출퇴근한다. 대통령이 출퇴근하거나 사람을 만나려 나들 때 안전을 책임지거나 실행해야 할 경비팀이나 경찰의 부담은 얼마나 클까? 가늠하기 어렵다. 매일 출퇴근시 경비에 투입되는 용산경찰서의 과중한 업무부담, 경찰의 피로도와 치안공백 가능성에 대해 참사 이전에도 수차례 언론 보도가 있었다. 졸속으로 진행된 것은 언제나 부작용을 낳는다. 이태원 참사가 대통령실 이전과는 무관하다는 정부의 주장이지만 국민 안전과 치안의 공백은 발생했고 어떤 불행은 예견된 것이었다. 시스템을 무너뜨린 공백은 어떤 형태로든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과정에 대한 체계적인 검토 없이 즉흥적으로 이뤄진 졸속이 낳은 폐해는 그 여파가 지속되는데 인과를 밝혀내기 어렵지만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이전해 간 용산구의 대통령실 인근에서 일어난 대형 참사에도 대통령은 일주일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정중한 사과는 없다. 영정도 위패도 없는 조문장소만 찾고 있다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비슷한 사진만 계속 내보내며 어떤 이미지를 강조하는 모습인데, 진정한 애도는 이미지가 아닌 진정한 마음과 진솔한 사과에서 출발한다. 사과를 하면 지는 것이란 권위조직의 사고에 젖어 막무가내로 버티며 여론을 호도하려는 듯하다. 순방 중 영국이나 미국에서 보인 자신의 분명한 실수나 막말 파문에도 그렇게 버텨서 잘 견뎌냈다고 믿으며 충실하게 연기하는 듯하다. 부끄러움과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이 용기다. 그곳에 희망이 자란다. 감추고 회피하고 호도하는 것이 강함이 아니다. 비겁함이다. 위정자가 자신의 명백한 잘못에도 말을 바꾸며 터무니 없는 논리로 갈등과 혼란을 부추긴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고 국가와 국민의 불행이다. 어디에서 믿음이나 신뢰를 찾을 수 있을까? 기본적인 신뢰마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균형, 책임, 투명, 인정과 개선 등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관의 혼란이 두렵다. 더욱 희망을 볼 수 없고 찾을 수도 없는 이유다.
국내외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시대다. 감정적인 인신공격이 난무하던 지난 대선이었다. 진위를 알 수 없는 가십성 뉴스가 올바른 선택의 눈을 흐리던 때, “상황을 바르게 판단하고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대통령을 선출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에 “국회가 있고 삼권분립이 되어 있으며 국가 시스템이 작동하기에 대통령 혼자 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다”고 주장하던 친구가 있었다. 누가 돼도 비슷할 것이니 자신은 철저히 개인적인 실리 위주로 투표하겠다는 솔직한 그를 끝내 설득할 수는 없었지만 다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누가 돼도 정말 비슷한 것인지, 신도시 개발과 부동산으로 지금 기대하던 실리는 취하고 있는지, 국제적으로 나라의 위상은 어떻고 지금 나라는 안전하게 제대로 가고 있는지 묻고 싶다. 대통령은 국가와 국민의 희망을 크게 키울 수도 있고 절망을 증폭시킬 수도 있다. 권력의 요소 요소에 핵심 심복을 심고 갈등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 하면 정말 가늠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절망을 줄 수 있는 권력이다. 그때 우리는 희망을 선택한 것일까?
회피하고 변명하며 책임지는 리더가 없는 사회의 참사는 일회성이 아니고 반복될 수 있다. 지금은 운이 따라 안타까운 353 명의 희생자에 들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나와 내 아이, 가족이나 친구 그리고 내 이웃이 희생자일 수 있다. 어떻게 이 어두운 상황을 극복하고 희망을 키워 낼 수 있을까? 암울하지만 희망은 그래도 사람에 있다. 이태원 참사의 참담한 희생과 지극한 슬픔이 그냥 지나가는 사건이 될 수는 없다는 깊은 의식으로 진정 애도하는 사람, 깨어 있는 시민과 국민.. 바로 사람이 그 희망이다.
이 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