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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산은 Mar 03. 2020

녹색등을 기다리며

이른 오후 사무실 건물을 막 나서는 중이었다.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잘 장식된 건물은 6차선 큰 도로가 교차하는 한 모퉁이에 있다. 네거리를 둘러싸고 횡단보도가 있는데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며 녹색 신호등이 들어온다. 건물 돌계단에 서서 대각선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가볍게 보았다.  긴 겨울을 이겨낸 가로수가 햇살에 기지개를 켜고 있고, 그 아래로 걷는 사람들이 제법 늘었다. 어깨를 편 모습 들이다.  계절은 사람들 어깨에서 다르게 느껴진다. “신호등이 바뀌려면 시간이 좀 있군.”  나는 눈을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눈을 뜬다는 경칩을 기다리는 햇살 사이로 스며있는 기운이 벌써 따사롭다. 어느 양지바른 연못엔 올챙이가 되려는 뭉클한 덩어리에 까만 눈들 점점이 박혀 있겠지.  큰길을 따라 봄을 품은 바람도 듬성듬성 무리 지어 떠돌고 있었다.  


“혹시 근처에 이발소가 있을까요?”  마른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직감적으로 내게 건넨 말이라고 느꼈지만 혹시나 하고 옆과 뒤를 돌아보았다.  나 외엔 말 받아줄 아무도 없었다.  현관을 받치는 우람한 돌기둥 옆에 아주머니 한 분이 숨바꼭질하듯 서 있었다.  언뜻 혼잣말인가 했지만 눈길을 보면 내게 묻는 것이 분명했다. 철 지난 까만 누비옷을 입고 있었는데, 검은색 톤이 작은 체구를 더 작게 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초라함을 적절히 감추어 준다고 생각했다.  파리한 얼굴과 마른 입술은 피곤한 기색인데 어쩌면 약간 빈혈증이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화장기 없는 푸석한 얼굴이지만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사실은 눈매는 차분했고 어떤 기품도 있어 보였다. 고급스러운 화강암 기둥과 어떤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글쎄요. 근처에 이발소는 없을 겁니다. 요즘은 남자들도 미용실에서 이발을 하니까요. 이런 번화가에서 이발소가 사라진 지 오랍니다.  시골에 가면 아직 더러 있겠지만.” 나는 뭔가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얇은 미소를 담아 대답했다.  “그러면 면도는 어디에서 하지요?”  뭐라 대답을 할까 망설이는데 그녀의 말이 이어졌다. 더 이상 떨림은 없었지만 가는 목소리는 잦아들 듯 살아나고 있었다. “사실은 저기 계신 분이 시 아버지신데, 언제부터 면도를 하시겠다고 이발소를 찾고 있답니다.  오랫동안 치매를 앓고 있어요.  이발소에 가겠다고 매번 집을 나서는데, 길 잃을까 걱정되어 한사코 못 나가게 합니다. 일전엔 아프신 시 어머님이 가위로 면도를 해 주셨지요. 듬성듬성 자른 게 보기 안 좋은데 워낙 억센 수염이라 어쩔 수 없어요.”  횡단보도 앞엔 예 일곱 사람들이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오른쪽 끝 가로등 기둥을 등지고 작은할아버지 한 분이 서 있었다. 워낙 여위고 체구가 작아서 의도적으로 보지 않으면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모습이었다.  가만 보니 까만 지갑 같은 것을 손에 들고 뭔가를 찾다가 뒤집어도 보고 흔들기도 하였다.  “오늘도 집을 나서길래 못 나가시게 하려도 지갑에 있는 돈을 모두 달라고 했어요. 순순히 만 오천 원을 다 꺼내 주시더라고요.  그래서 안심했는데 한 눈 파는 사이 집을 나오셨답니다.  바로 따라 나와 다행이었어요. 모시고 돌아갈까 하다가 어떻게 이발소를 찾아 가시나 이렇게 아버님 모르게 뒤를 따라가고 있어요.  햇살이 좋으니 바람 쬐셔도 괜찮다 싶은데, 차도 많고 위험해서 조마조마해요.  지금 지갑의 돈을 찾고 있어요.  제게 다 주신 것을 잊어버리고….”  그녀의 눈가에 안개 같은 이슬이 스쳤다.  


화강암 무늬가 조용히 내리는 듯했다.  말소리는 눈 녹은 실개천 흐르듯 조용했다.  노란 옷을 두텁게 입은 할아버지의 회색 빛 푸석한 머리에 따뜻한 햇살이 내리고 있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돈을 찾는 모습이 조금 안쓰러웠지만 마음 한편 따뜻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봄기운이 가슴에 고여왔다.  이발소에 가서 단정하게 면도를 해야겠다는 할아버지의 기억은 얼마나 생명력이 강한 것인지. 익숙한 손놀림으로 산뜻하게 면도를 해주던 투박한 손길을 기억할 것이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절의 향수를 할아버지는 찾아 나선 것은 아닐까?  어렵게 나선 길 실망시키지 않으려 몇 발작 거리를 두고 따르는 며느리의 따뜻한 마음이 바람처럼 맴돌았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간단히 눈인사로 안전한 봄나들이되기를 빌었다. 아직도 지갑에 몰두한 할아버지는 건널 생각은 없어 보였다. 고슴도치 같은 할아버지 수염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한 번의 신호등을 기다리는 시간에 아름다운 시가 눈앞에 흘러가고 있었다.  맴돌던 바람도 미소 띤 채 스쳐 갔다.

 

글/이산은(李山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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