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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산은 Jan 05. 2019

스펙트럼을 품다

프롤로그

“태양계에 있는 스스로 빛을 내는 수백 개의 항성들에 대한 스펙트럼을 조사할 계획이다”. 


오래전 미국 출장 중 스친 내용이다. 경영자로 출발하는 30여 명의 참석자들이 지속가능 경영과 리더십에 대한 토론을 하는 일주일 프로그램의 시작 즈음이었다. 시차로 힘든 하루를 마치고 저녁 식사 전 자투리 시간, 둔중한 피곤을 느끼며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한적한 휴게실 탁자에 펼쳐진 신문한 면을 보다가 예기치 않은 순 간 스펙트럼SPECTRUM은 섬광처럼 내게 왔다. 


어떤 단어나 생각 혹은 장면은 내부에서 달이 커지듯 나무가 자라듯 숙성되기도 한다. 항성의 스펙트럼 조사, 그것은 항성 간 차이를 분석해 우주 생명체의 존재를 연구하거나, 우주 탄생의 비밀을 연구하는 목적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잊혔지만 흥미 있는 연구라는 느낌과 단어의 선명함은 여전하다. 항성과 항성 사이에는 얼마 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일까? 


스펙트럼은 빛이 분광기를 통과할 때 파장의 순서에 따라 분해되어 나타나는 빛깔의 띠다. 존재의 특성과 범위를 규정하며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을 스펙트럼이라고 정의할 때, 사람이나 사람의 활동으로써 경영 또한 스펙트럼으로 표현될 수 있지 않을까? 삶이나 경영의 스펙트럼은 본질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어떤 장치에 대상이 투영되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빛 무더기를 상상한다. 


별처럼, 대상이나 물질은 자기 스펙트럼을 갖는다. 대륙이나 나 라들도 서로 다른 스펙트럼이 있다. 미국, 중국, 인도에 갔을 때 그리고 많은 나라들을 찾았을 때 다른 스펙트럼을 느낀다. 문화일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무엇이다. 고유한 파장이다. 


사람의 스펙트럼은 어떤가? 자신은 물론 타인 그리고 환경의 스펙트럼과 교차하며 상승하고 하강하고 변화하는 사람의 스펙트럼은 더욱 다채로울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괴테, 추사 김정희와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 그리고 타고르나 버트런드 러셀 등이 보여준 지적 호기심과 빛나는 저술 활동들을 생각한다.  소크라테스나 석가모니,공자나 예수 그리고 간디나 김수환 추기경 등 많은 분들의 사상이나 영성의 깊이도 그렇다. GM의 마케팅 차별화와 성장 신화를 만든 알프레드 슬론이나,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고귀한 사업철학을 구현한 유일한 박사, 아이폰을 만든 혁신의 아이콘 스티브 잡스 등 여러 경영자를 떠올리며, 그들의 스펙트럼을 생각해 본다. 


삶을 관통하는 스펙트럼이 있고 특정 시점의 스펙트럼도 있을 것이다. 사람마다 어떤 스펙트럼은 넓어 가늠하기 쉽지 않을 것이며, 특별한 스펙트럼도 있을 것이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빛들이다. 서로 다른 스펙트럼은 내부 요소들의 분포와 강도, 밀도, 채도 그리고 요소 간 경계에서 다양한 차이가 있을 것이며 통합적인 모양이나 선 명함에서도 분명 다를 것이다. 



삶에서 그리고 경영자로 어떤 스펙트럼을 갖고 있으며 또 추구할 것인가? 스펙트럼이 화두가 되었다. 한 단어가 내 안에서 숙성되어온 시간은 그 단어로부터 잉태한 질문이 숙성되어 온 시간이기도 하다. 


경영과 리더십에 대한 질문은 스펙트럼과 연결되며 모이고 흩어졌다. 가족과 집을 떠나온 거리만큼, 시간만큼 생각은 꼬리를 물 고 호숫가 잔물결처럼 찰랑댔다. 장난스럽게 주변을 맴돌았다.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스스로 간직할 스펙트럼 SPECTRUM 개념과 모델을 구성했다. 열정과 몰입의 순간이었다. 스펙트럼 개념을 도식화하고 지우고 바꾸며 다듬어 갔다. 그렇게 하나의 단어가 씨앗이 되고 통합적인 개념으로 자라 구체화되어 스펙트럼 모델SPECTRUM Model이 탄생했다. 지난 십수 년은 나만의 스펙트럼을 찾고 키우며, 누구나 갖고 있을 그들의 스펙트럼을 존중하며 경영자로서 한 발 한 발 나아온 시간이었다. 


글로벌 기업 카길Cargill 동물영양사업분야에서 중국, 한국, 그리고 미국을 오가며 2005년부터 2018년까지 13여 년을 최고경영자로 활동했다. 2001년부터 5년간 아시아 10여 개 국을 대상으로 연구 및 기술 관련 업무를 총괄했으니, CEO 기간을 합해 약 18년을 글로벌 경영현장에 있었다. 급변하는 사업 환경과 서로 다른 문화 속에서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일하며 경영활동을 해왔다. 다양한 스펙트럼과 교차하며 경영현장을 경험한 것이다. 어떤 어려운 일이나 돌변 상황에서도 나를 잃지 않으려 했고, 유기적이고 통합적으로 그것들을 풀어가는 과정에 스펙트럼 모델이 함께 했다. 


최고경영자 전 기간을 통하여 안전, 직원만족도, 고객만족, 사업 성장 그리고 사회공헌이라는 다섯 가지 경영지표에서 매년 최상급 평가를 받았고, 카길 동물영양사업부 및 카길 그룹 전체에서 여러 차례 최우수 사업장으로 선정되어 수상하는 영예도 안았다. 불확실 한 시장과 사업 환경에서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았고 예기치 않은 일들 그리고 말 못 할 어려움도 많았다. 모든 상황을 극복하며 조직과 팀으로, 함께 만든 통합적 결실이기에 경영자로서 자랑스럽고 보람 있는 일이었다. 대단한 업적이란 이야기에 계면쩍기도 하고 능력 이상의 평가라고 생각하면서도, 카길이 사업하는 70여 다른 나라나 글로벌 1,500여 사업장들과 비교한 객관적 경영평가에서 보면 탁월한 성과를 낸 것 또한 분명하다.


몇 년간 사회 경험을 한 후 내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계획으로 오래 몸담았던 대학을 떠나 39세라는 비교적 늦은 나이에 회사에 입사한 것이 1997년 초, 엊그제 같은데 스무 해가 넘었다. 자율적으로 일하고 도전하고 책임지는 기업문화가 나와 맞았고, 미국, 중국 그리고 한국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며 소신껏 일할 수 있었다. 과정에서의 책임감과 보람이 다른 곳으로 떠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비록 내 사업을 시작하지는 못했지만 내 사업이란 마음으로 일하다 보니, 다양한 일들을 보람으로 해 낼 수 있었고, 계획보다 오래 회사에 머 물렀다. 


위기 상황에서 비전을 잃지 않고 균형 있게 사안을 보며 어려움을 극복한 힘으로써, 경영자 초기부터 개념화하고 활용했던 스펙트럼 모델SPECTRUM Model을 정리하여 공유하고자 한다. 언제부터 체계적으로 나누고 싶었는데 이제야 시간을 가지고 정리한다. 사실 그간 스펙트럼 개념은 나의 삶과 경영의 축으로 적용되었는데, 스펙트럼 모델로 소개하는 것은 이 책을 통해서다. 


1970년대 후반 대학에 입학해 여러모로 생각이 많았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느끼며 삶의 방향을 고민하던 때였는데, 방황 중에 글을 쓰겠다며 도서관으로 등교하고 문학을 섭렵하면서 어떤 열기 속에 보낸 시절이 있었다. 글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누는 능력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때 스무 살 시절에 겪은 방황이 낳은 산물일 것이다. 


글로벌 전문경영인은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직업이지만, 스트레스도 적지 않고 최종 결정과 책임에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치열한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많다. 매월, 매년마다 경영성과는 투명하게 평가된다. 언제라도 한 줄의 E-Mail로 그만둘 수 있다는 쿨cool한 마음으로 일하면서, 사방에서 들여다보이는 유리방 안에 있다는 생각도 한다. 지난 시간, 나에게 탈출구 같은 역할을 한 것은 등산과 글을 쓰는 시간이었다. 등산을 하면서 어느 나라보다 한국만큼 정이 넘치고 친근한 산은 없다는 생각을 했다. 공중에서 떨어져도 포근히 받아 줄 만한 우리 산들이다. 산에서 걷고 보내는 시간은 긴장을 풀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시간이었다. 


한편, 등산은 적지 않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준비도 해야 하지만, 글을 쓰는 일은 어느 곳 어느 시간에도 가능하며 간편하고 효과 좋은 방법이었다. 자투리 시간에도 충분히 가능했다. 출장 중, 책을 읽다가, 혹은 문제에 빠져 고민하다가, 하나의 생각이 싹트면 메모를 하고 시간 날 때 글로 정리하곤 했다. 글을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차분 해진 나를 보게 된다.  1970년대 말 혼돈의 시절에 마음을 잡아준 것 이 글쓰기였다면, 경영자로 치열한 시간을 보내는 과정에서도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 것은 글쓰기였다. 젊은 날 한때 열정이 낳은 후유증이, 경영자로서 의미 있는 시간을 가꾸고, 삶의 한 가치인 탁월함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경영의 요체는 체계적인 생각의 개념화이고 설정한 방향을 효과적으로 팀과 소통하는 것이라 한다면, 글 쓰는 일은 개인적으로는 스트레스를 이겨내는 과정이면서, 사업적으로는 직원들이나 이해 관계자들과 효과적으로 마음을 나누고, 나아갈 방향을 공유하는 역할도 하였다. 스펙트럼의 줄거리와 내용은 오래 숙성된 것이지만 이렇게 책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강 하구에 쌓인 퇴적층 같은 시간의 흔적 위에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써 내려간 글이다. 


내 삶과 경영현장에서 오랜 시간 교감을 나눈 카길애그리퓨리나, 카길그룹 임직원 여러분, 은사님과 여러 대학 그리고 사회에서 만난 선후배, 존경하는 사업 파트너와 고객분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선뜻 출판을 결정해 주신 카모마일북스 정윤희 대표와 임직원께 깊이 감사드리며, 마지막으로 항상 기도해 주신 부모님과 가족들 그리 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기도를 나누는 삶의 동반자 민주, 운현, 호영에게도 깊은 고마움을 전한다. 


내 삶 그리고 나의 경영활동을 돌아보며 핵심을 추리고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의미 있게 생각하며 함께 나눈다. 


모든 삶은 매일매일 무언가를 창조한다. 


글/ 산은山隱 이보균李輔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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