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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na Jan 22. 2020

너는 왜 그렇게 '정'이 없니?

한 사람이라도 불편하고 싫으면 그건 더 이상 '정(情)' 이 아니다. 

한국인에게는 '정' 문화가 있다. 영어로도 번역할 수 없는, 한국인이라면 모두 알지만 말로 딱 꼬집어 설명하기는 좀 힘든 '정(情)' 문화는, 기본적으로 참 따뜻하고 좋은 가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는 자라오면서 '정'이 없다는 얘길 꽤 많이 들으면서 컸는데, 사실 적극적으로 부인하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정'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인데, 일단 나는 남에게 관심이 그다지 많지 않을 뿐더러, 개인적(사실은 이기적)인 성향이 강하고, 나 자신과 타인과의 거리감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정이 전혀 없어보이고 매몰차보이기 쉽다. 하지만 정에 얽매여 억지로 남들과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느니, 그냥 매몰차단 소릴 들으며 혼자 있는 편을 택하는 것이, 성향상 훨씬 더 잘 맞는다. 


그렇다고 내가 반 사회적인 성격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착해보이는 인상과 잘 웃고 친절한 태도 때문에, 처음 만나면 친하게 지내자고 다가오는 사람이 무척 많다. (오랜 비서직 생활로 인해 베인 태도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냥 오랜 직장생활에서 나온, 습관적인 매너일 뿐이고, 친절하고 예의바른 웃음 뒤로는, '거기까지, 더 이상 다가오지 마시오'라는 마음 속 팻말을 늘 꺼낼 준비를 하고 있다. 


나처럼 습관적으로 친절한 태도를 가진 사람의 마음 이면에는, 조금 극단적으로 말하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예의를 지키고 친절을 베풀게요, 그러나 당신도 나에게 이 정도의 거리와 예의를 지켜주세요' 라는 바램이 도사리고 있다. 


나의 친구들은 대부분 10년, 20년 이상 오랫동안 본 친구들이고, 그런 친구들마저도 사실 모든 것을 공유하진 않는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나의 이러한 폐쇄적인 부분을 좀 싫어하기도 했는데, 내가 아이를 낳아서 키워보니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내 아이도 나와 완전히 똑같기 때문이다. ㅎㅎ 


아직 어리지만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고, 간섭받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조금이라도 간섭을 하려고 하면, 일부러 반대로 엇나간다. 혼자서 공상에 잘 잠기고, 집중력은 정말 뛰어나다. 그럴 때는 그냥 내버려 둔다. 작은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서, 어떤 마음인지 너무나 잘 알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금은 정 없고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성격으로 이제껏 잘 살아왔는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니, 내가 원하지 않는 수많은 인간관계에 많이 얽히게 되었다. 특히 '시댁'과의 관계가 그렇다. 


나의 시어머니는, 정말이지 안타까울 정도로 정이 너무 너무 많은 분이다. 가족들과 끈끈하고 가깝게, 모든 일상을 공유하며 지내고 싶어하신다. 안 그래도 사는 동네마저 10분 거리이기 때문에, 시어머니는 주말마다 다 함께 모이고 싶어하신다. 


나는 처음부터 '아웃사이더'를 자초했다. 직감적으로, 내가 모든 분란의 씨앗이 될 것이라는걸 알았기 때문이다. ㅎㅎ  나에겐, 그냥 시댁 식구들과 한 동네에 사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다. 아무리 좋은 의도로 걱정해주고, 챙겨주고, 친해지고 싶어서 다가오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나에겐 엄청난 스트레스였다. 


다행히 남편도 나와 비슷한 성격이어서 이런 나를 잘 이해해주었다. 다른 식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머님은, 끝끝내 이해하지 못하시고, 지금도 여전히 서운해하시며, 얼굴을 볼 때마다 그 서운함을 쏟아내신다. 


솔직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제가 좀더 노력해볼게요,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성격 상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진 못하겠다. 


주변에서는 그냥 네,네 하고 안하면 되지, 대답이라도 잘 해드려, 라고 조언해주었지만, 마치 거짓말을 하라는 것 같아서 그것도 마음이 불편하다. 그리고 굳이 왜 거짓말까지 해 가며 잘 보여야 하는지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어머님은 앞으로 평생을 볼 사이인데, 어머님도 나의 본 모습을 알아야 하시지 않을까? 그것이 당장은 조금 힘들어도, 서로의 장기적인 관계에서는 훨씬 더 바람직하고, 힘들어도 어쩔 수 없이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관계의 칼자루를 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정'을 강요하는 것은 정말 아닌 것 같다. 우리 어머님도 언제나, 너희들이 걱정되고 가깝게 지내고 싶어서 그런다고 말씀하시지만, 한번도 그 진심이 느껴진 적은 없었다. 


정말로 우리를 걱정하고 위하신다면, 면전에서 대접 못 받는다고 서운함을 토로할게 아니라, 니들끼리 알아서 잘 살겠지, 하는 여유로운 태도로 조금은 무심하게 대하는 것이, 훨씬 더 어른스럽게 느껴진다. 


시어머니를 보면, 매년 발렌타인 데이 때마다 초콜렛을 50개씩 사 가고, 적성에도 안 맞는 장기자랑을 준비하던 신입사원 시절이 떠오른다. 명절이라고 평소에도 별로 챙기지 않던 '정'을 확인하기 위해, 갑자기 누군가의 일방적인 노동과 희생이 강요된다면, 그건 '정' 문화가 아니라, 그냥 '가부장' 문화의 잔재일 뿐이다. 


솔직히 내가 언젠가 시어머니가 된다면, 나는 명절 자체를 없애버리고 싶다. 명절이 시작되기 전에 자식 내외를 만나 좋은 식당에서 밥 한끼 사주고, 명절은 각자 편하게 여행이나 하고 집에서 쉬면서 여유롭게 보냈으면 좋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구정 연휴에, 대한민국 며느님들 모두 파이팅 하시길... 나를 포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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