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식 행위 같은 채용절차를 끝내고 황정우는 그럭저럭 적응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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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우는 여의도 센텀 빌딩 38층 사무실에 앉아 있었다. 전당대회와 당대표 경선이 이제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곧 당 대표 선발을 위한 전국 순회 경선이 진행될 것이다. 형주에서 일어났던 일의 소식이 뉴스를 탔다. 피해자는 30대 여성 최모씨. 정주시에서는 30대의 조직폭력배 방모씨가 살해됐다고 했다. 방준호가 전라도 일대의 조폭이 된 것은 알고 있었다. 사건은 가해자가 정신병자거나 상대편 조직일 것으로 알려졌다. 방준호까지는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았다. 형주에서 숨진 최모씨가 최영은이라는 것을 확인하자 팽팽한 활시위에서 활이 떠났다는 느낌이 들었다. 골칫거리가 사라진 것이다. 5년 전 갑자기 최영은이 나타나면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방송 촬영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오랜만에 보고 싶다는 얘기를 한 것이다. 최영은은 이후 거의 5년마다 한번 씩 돈이 필요하면 연락을 해왔다. 이번에는 주기가 짧다. 귀찮은 요구가 될 것임이 분명했다. 슬슬 결혼을 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꺼내고 있다. 이제는 그냥 넘길 수가 없을 지경이다. 황정우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석동 일대 재개발에 대한 정보와 입막음 비용을 주고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최영은은 끝까지 뭔가를 더 얻어낼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 보였다.
최영은이 이렇게 전락적으로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보험을 들어뒀어야 하는데 그년을 너무 순진하게만 생각했다. 완전히 말려들었다. 악연이라고 하면 악연이고 인연은 인연이다. 다행스레 최영은이 무슨일인지 사라져 골칫거리가 줄어들었지만 안심할 수는 없다. 혹시 자신이 실수한 것은 없는 지를 떠올렸다. 아니다. 최영은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뭔가를 남겨놓을 위인도 머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 굳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형주고 이전만 끝나면 귀찮은 상황은 끝이다. 그는 학교에 있었던 시절을 떠올렸다. 최영은이 살해됐다는 소식은 기억을 소환했다. 황정우는 그날 수업이 끝난 후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4시 이후 연차를 쓰고 일찍 나갈 생각이었다.
담임을 맡은 첫 해였다. 기간제 교사로 학교에 들어왔다. 자신이 원하던 일은 아니었다. 담임까지 맡을 생각도 교사 일을 할 의도도 없었다. 학교가 돌아가는 방식을 적당히 파악하고 그만둘 생각이었다. 황호민의 생각은 달랐다. 황정우가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이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학교법인의 일은 알아야한다고 말해 학교에서 일을 하라고 설득과 다그침을 이어갔다. 그게 둘을 위해 좋은 선택이라고 여긴 것이다. 어쩔 수 없었다. 황호민의 의중을 파악한 교감은 반기를 드는 선생들을 대충 정리한 뒤 주기적으로 상황을 황호민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승진을 위해서는 그 역할이 필요했다.
― 황정우 선생. 오늘은 일찍 왔네요?
―아 네....... 어쩌다 보니 잠이 안와서요. 새벽에 일어나 좀 뛰다가 일찍 왔습니다.
― 역시 젊음이 좋기는 좋 구만. 허허. 교감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저 늙은이가 요새 부쩍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유가 있겠지’ 황정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조만간 학교정상화위원회에 있는 선생들과 한판 할 생각인 것이다. 가끔 일찍 학교에 오면 교감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그와 이야기를 나누려했다. 교감의 과도한 친근함은 항상 뭔가 부담스러웠다. 정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뭘 그리 들러붙는지. 불필요한 호의였다. 교장이 되기 위한 몸부림인 것이다. 기간제 교사 초기 아이들을 대하는 법도 잘 몰라 당황한 적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신경이 덜 쓰이도록 반복되는 잡무를 하라며 배려해줄 때는 좋았다. 모두가 다 퇴근한 늦은 시간에 그는 슬쩍 와서 선생들의 성향과 동태를 파악한 보고서와 같은 내용을 슬쩍 들이밀기도 했다. 최근 몇몇 선생들이 재단의 전횡에 반기를 들고 일을 꾸민다는 얘기를 넌지시 들려주었다. 황정우는 어리둥절했다. 황의원와 자신을 배려한 나름의 전략인 듯 했지만 번지를 잘못 찾은 것이다. 교장은 학교와 재단 학교 운영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는 황정우의 성향을 잘못파악하고 있었다.
요식 행위 같은 채용절차를 끝내고 황정우는 그럭저럭 적응을 했다. 새 학기가 시작되자 교감은 대뜸 황 선생이 담임을 맡아야 한다고 했다. 황정우가 학교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생활지도와 상담 경험 아이들을 대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학교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이사장인 아버지 황호민에게 이야기를 해 놓은 것이다.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욕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그는 간신히 참아냈다. 어쨌든 몇 년은 버터내야 한다. 끝까지 맡지 않겠다고 할 수도 있었지만 교감은 이사장인 아버지쪽 사람이었기 때문에 좋은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자신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선생들과 교무부장이 자신을 엿 먹이기 위해 일을 벌인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최영은과는 그때 처음 만났다. 2학년 담임을 맡은 반에 그녀가 있었다. 담임은 귀찮은 일 중 하나였다. 1년만 하고 더 이상 맞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역시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잠복을 하고 있었다. 여자애들 중 그나마 최영은이 제일 나았다. 눈에 들어오기도 하고. 최영은에 대한 얘기를 다른 선생들로부터 들었다. 악명 높고 교활하다고 했다. 생활기록부와 가정환경을 보니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혹시? 뭐 테스트를 해보면 알겠지. 인간들을 비슷한 상황에 몰아 넣으면 어떤 행동패턴을 보이는지 관찰하는 것은 흥미롭다. 최영은을 좀 써먹을 수 있을지 테스트를 한번 해 볼 필요는 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학기 초의 바쁜 일정이 끝나고 4월 중순 봄밤이었다. 밤 10시쯤 지구대 경찰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날 늦게까지 이런저런 학교 업무를 정리하고 있었다. 담임이 처음이라 학생들 정보와 상담 등 처리해야 할 것이 많았다. 황정우는 서서히 늘어나는 업무에 짜증이 밀려오는 중이었다.
― 황정우 선생님 되십니까? 갑작스런 전화에 그는 당황했다.
― 근오 지구대 최경영 경사입니다. 학생들이 패싸움을 벌어 일단 지구대로 데려왔습니다. 한 아이는 병원으로 옮겨졌고요. 나머지 아이들은 보호자가 왔는데 최영은은 보호자가 없다고 하네요.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가 계시는데 의식이 또렷하지 않은 듯 해 일단 보호자가 필요해 전화 드렸습니다.
― 어디라고요? 일단 제가 가겠습니다.
황정우는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었다. 거친 아이들이 반에 몇 명 있었지만 이런 일까지 벌일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중앙공원 근처의 지구대였다. 차를 근처에 세우고 문을 열고 지구대로 들어가자 익숙한 교복이 보였다. 최영은은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파묻고 있었다. 교복블라우스 어께와 팔뚝에 피가 묻어 있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황정우는 모니터를 있는 경찰관에게 물었다.
―집단 패싸움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데려온 거고 쌍방 폭행으로 일단 처리를 했어요. 다른 아이들은 도망가고 저 학생하고 다른 한명만 지구대로 연행됐습니다. 최영은 학생이 할머니랑 산다고 하는데 통화가 안 되더군요. 노환으로 몸이 좀 좋지 않다고 합니다. 조서는 받아 놓았고 둘 다 크게 다치거나 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상대편에서는 사건을 조용히 넘기고 싶어 하는 것 같더군요. 저희가 경찰서로 사건을 넘기면 조서 받고 소년보호 사건으로 송치됩니다. 원칙대로 하면 그렇죠. 지구대 경찰관은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최영은을 힐끗 보고 말을 이었다.
―저도 중학생 아들 키우는 입장에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보호자한테 잘 말씀드려서 잘 마무리 되는 게 아무래도 좋습니다.
― 알겠습니다. 가급적 번거로운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최영은은 마땅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황정우는 최영은을 옆자리에 태웠다. 주소를 물어 일단 집으로 향했다. 헝클어진 머리와 피가 묻고 너덜해진 교복셔츠가 눈에 들어왔다. 황정우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유가 뭐냐 시시콜콜한 것을 캐묻는 것도 귀찮은 일이었다. 침묵을 참을 수 없었는지 최영은이 말을 꺼냈다.
― 쌤 왜 아무것도 안 물으세요? 최영은은 훌쩍거리며 물었다.
― 물어봐야 하냐? 뻔한 말들이겠지. 그는 최영은을 힐끗 쳐다보며 심드렁하게 답했다. 학기초 개별상담시간에 최영은은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는 듯 보였다. 황정우는 최영은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골칫거리 아이들에 대한 정보도 대충 입수한 상태였다. 최영은이야 이제는 학교에서 유명인사였다. 다그쳐봐야 역효과만 날 뿐이었다. 자신도 그랬던 경험이 있으니까. 상담하는 인간들은 마치 자신들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양 구는 것들이 많다. 뭣도 모르는 것들이 말이다. 지금은 좀 놔뒀다가 형식상 상담 일자를 잡아서 따로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낫다. 뭐라도 먹으며 핑겟 거리를 들으려면 거리감을 좀 더 좁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말도 안하면 그것조차 짜증이다.
―저녁은 먹었냐? 뭐라도 먹으면서 얘기나 좀 하자. 흥분이 된 상태라 뭐가 잘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달달한 것을 좀 먹고 목을 축여야겠지.
최영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집은 반석동 주택가의 오래된 단독이었다. 골목길로는 차량이 들어갈 수 없다. 1970년대에 지어질법한 도로 이면 가장 안쪽이었다. 황정우는 동네를 한 바퀴 돌아 한 대로변 커피숍 근처에 차를 세웠다. 학원시간이 끝났는지 아이들 무리가 우루르 몰려나왔다. 학원차량들이 대로변으로 몰려들었다. 지난번 상담을 하며 사고를 치지 않겠다는 다짐을 형식상 받았지만 그 말은 부도수표였다. 곧 본색을 드러낼 것이라는 것을 황정우는 직감했다. 레몬 에이드를 시켜 둘은 자리에 앉았다. 스무 살 초반대로 보이는 한 커플이 강이 보이는 창가 쪽 소파자리에 나란히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최영은이 갑자기 책상에 엎드려 훌쩍이기 시작했다. 도발로 시작하나? 그녀와 자신에게 시선이 쏠렸다.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이후 최영은을 진정시켰다. 눈물을 쏟던 그녀는 훌쩍거리며 잠시 감정을 가다듬고 있었다. 잠시 후 커피숍에서 나와 둘은 차에 올랐다. 긴장이 풀렸는지 제대로 걷지 못하고 다리에는 힘이 풀려 있듯 비틀거리며 차에 올랐다. 반석동은 몇 블록 앞이었다. 차가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골목길 앞에 그녀를 내려준 뒤 최영은은 차에서 내려 터덜거리며 골목으로 사라졌다. 황정우는 짧은 치마를 입은 최영은의 뒷모습을 보며 뭔가 설명할 수 없는 야릇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날 것 그대로의 성욕이 느껴졌다. 발육이 빠른 아이였다.
형주고 도서관건물을 신축 중에 있었다. 공사가 진행되자 중학교와 고등학교 중간에 있던 오래된 도서관 건물은 서고와 창고처럼 활용 중이었다. 중축중인 건물 일부는 학생을 위한 독서실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업체의 문제로 인해 공사가 몇 달 간 늦어지는 중이었고 황정우는 구 도서관 책 관리를 임시로 맡았다. 사서는 출산휴가 중이었다. 생각해보니 수업자료를 핑계로 장서실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자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정우는 사회과목을 위한 독서 목록과 학생들에게 줄 고전자료를 찾는다는 핑계를 삼아 가끔 그곳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다. 다른 선생들과 귀찮게 마주치지 않고 입바른 소리를 내뱉지 않아도 된다. 공사는 학기 초에 시작해 한 달 반을 넘기고 멈춰 있었다. 학교법인이 소유한 반석동 일대의 토지 매각으로 공사대금을 일부를 충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토지 일부 소유권을 두고 송사가 진행돼 가처분이 내려진 상태였다. 아버지 황호민에 대한 불만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선거에 대체 자금을 얼마나 쓴 것인가. 이후 여러 입을 틀어 막느라 이제는 유보금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오후 수업이 몰려 있는 날이었다. 그는 수업이 끝난 후 교육청에서 요구한 행정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생물교사 윤영근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아이고 이거야 원. 어떻게 이게 이렇게 안 되나.
윤영근은 일어나 두리번거리며 허리를 좌우로 돌리며 기지개를 펴고 있었다. 40대 중반이다. 머리는 절반정도 벗겨져 있었고 두꺼운 풀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옆과 뒷머리는 희끗한 숱으로 풍성해 흰꼬리 수리처럼 보였다. 여학생들에게 알게모르게 추군댄다고 이야기가 도는 자다.
― 황선생은 퇴근 안 해요? 요새는 뭘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어. 그는 황정우의 자리로 가 슬쩍 황정우의 노트북 컴퓨터를 쳐다보았다.
― 아이들 읽혀야 할 고전자료 편집하고 교내 장학생업무처리 학부모통지문도 만들어야 해서 시간이 걸리네요. 그는 웃으며 말했다.
―고생이 많아요. 잠깐 나 이것 좀 봐주면 안 될까? 황정우는 윤영근의 자리로 가서 교육 정보부의 실습과목관련 동영상 학습 자료에 엑셀과 파워포인트로 시각효과를 처리하는 부분 자료 삽입을 도와주었다.
―이런 건 황 선생처럼 젊은 선생이 잘하는데 업무 분장이 잘못됐어. 그는 투덜거리며 옆에서 황정우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 다 됐습니다. 숙달되면 어렵지 않은데 여러 번 해보셔야 할 거예요. 보면 아는데 막상 또하려면 잘 안 될 때가 있어서요. 그는 짜증이 치밀었지만 사람좋은 가면을 둘러쓰고 웃으며 말했다. 이 짓도 하기 힘든 중노동이었다. 감정소모는 또다른 스트레스다. 시간은 9시 에 가까워 있었다. 그는 일이 마무리되어 기쁜 모양이었다. 노트북 상판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당직 근무자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황선생도. 어서 마무리하고 퇴근해요. 고마워. 내가 커피 쏘지. 그는 코트를 걸치고 교무실을 나섰다. 모두들 퇴근하고 교무실에는 황정우만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