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경린씌 Apr 11. 2021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뭔가를 배제한다는 것

[책 리뷰] 타인의 고통 | 수전 손택


네모난 프레임 속, 고정된 세계


한가로이 소파에 누워 TV 채널을 돌리다 보면, 큰 눈에 눈물을 감춘, 검은 피부의 작은 아이가 병에 들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구호 광고를 보게 된다. 누워있던 자세를 고쳐 잡고, 연민에 찬 눈으로 나 역시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시계를 보니 어느덧 8시. 좋아하는 채널로 돌리고 다시 편안한 자세로 눕는다. 처음 몇 번은 자세를 고쳐 잡지만, 이런 광고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더 이상 연민의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아 재빨리 채널을 돌리고 만다. 이 광고를 접하고 나에게 남은 것은, 그저 아프리카 사람들은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받는다는 이미지뿐이다.


사진이 먼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통을 우리 눈 앞에 가져온다는 걸 알았다고 해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흔히 사람들은 타인의 고통이 자신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작은 화면 속에 넘쳐나는 잔혹한 이미지. 카메라의 발명 이후, 단 한 장의 사진으로 모든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지자, 사진은 객관적인 ‘증거’로서 사용되었다. 사진은 세상이 변화하는 모습을 빠르게 캐치해 전달함으로써 그 자체로 역사와 시간을 대변한다. 사진이 현실의 거울 역할을 하기 시작하자, 사진기사들은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기 위해 직접 전쟁터로 뛰어들어 사진을 찍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서양의’ 사진기사들이 고통받는 아시아와 아프리카계 사람들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눈길을 사로잡을만한 자극적인 이미지들은 온갖 매체와 잡지 등에 전시되어 사람들의 거짓 연민을 이끌어내고, 사진가의 의도된 연출이 사실인양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는 사회에 비상을 알림으로써 사회적 문제 해결 촉구를 주장하지만, 사방팔방 폭력적인 이미지로 뒤덮인 사회에서 타인의 고통이란, 일종의 ‘스펙터클’로 소비된다고, 수전 손택은 말한다.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타자화”하여 거리를 두고, 그 거리 밖에서 동정과 연민을 즐기는 일종의 볼거리, 즐길 거리로 말이다. 그럼으로써 사진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보는 사람이 되고, 사진 속 사람은 영원히 보여지는 사람, 피해자로 낙인찍힌다. 연민을 느끼는 것이 ‘보는 사람’의 책무 인양, "연민은 쉽사리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무고함까지 증명해주는 알리바이가 된다." 수위 높은 사진들이 넘쳐나 공감 능력을 잃어가는 사회. 이러한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문제를 떠먹여 주는 동시에 등 두드려 도로 소화하는 것까지 도와준다.


사진 배경이 되는 장소가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 있고 이국적이면 이국적일수록, 우리는 죽은 자들이나 죽어 가는 자들의 정면 모습을 훨씬 더 완전하게 볼 수 있다. 이런 고통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곳에서 발생하는 일이라고 믿게 된다. 곳곳에 존재하는 이런 사진들, 이처럼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진들은 이 세상의 미개한 곳과 뒤떨어진 곳(간단히 말해서 가난한 나라들)에서야 이런 비극이 빚어진다는 믿음을 조장할 수밖에 없다.



@google 이미지






던져진 과제


'전쟁'으로 한정되었던 책 속 사진은, 오늘날 우리 세대로 넘어오면서 인터넷에 널린 각종 자극적인 사진들로 영역을 넓혀 간다. 이제는 SNS의 발달로 누구나 이미지를 생성, 편집할 수 있기에, 손쉽게 타인을 착취해 이익을 취할 수 있다. 공감을 강요하는 듯한 사진들에는 오직 선한 의도만이 들어있지는 않다. 쾌락을 위한 소비, 공유가 쉬운 세상 속에서, 익명의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집중을 얻기 위해 더욱 선정적이고, 혹할만한 이미지들이 끊임없이 생성한다. 혹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한 장의 사진을 내걸고 자신의 이념을 홍보하기도 한다. 이 책은 더 이상 언론과, 매체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저자는 사진에 파묻혀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생각해봐야 할 뼈 때리는 논점을 던진다.


반면 하루에도 수 천장의 이미지를 “소비”하며 가짜 동정을 일삼는 우리에게, 저자가 전해주는 구체적인 해결방안은 없다. 연민과 동정은 쉽지만, 공감과 행동은 어렵다. 이기적인 연민을 반성하고, 이제부터 그에 따른 행동을 취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이 역시도 분명 말 뿐인 또 다른 기만이라는 것을 알기에, 나는 이기적인 연민만을 느낄 뿐이다. 다만 진위여부조차 알지 못한 채, 사진이 주는 정보만을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잣대에 휘둘려 세상을 평가하지 않을 만한 식안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비판적 사고 없이 사진이 말하는 것 그대로를 수용한다면, 누군가의 의도에 철저히 조종당해 움직이는 것 밖에 되지 않기에 말이다.


사진은 애초부터 객관적이라는 공인을 받아 왔다. 그렇지만 사진은 언제나 특정한 시점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흔히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둘 경우, 사진이 ‘말해주는 것’은 다양하게 읽힐 수 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사진이 말해 줘야만 한다고 여기는 것을 읽게 된다. 각 사진들에 ‘창조자’가 있다는 사실, 각 사진은 그 누군가의 관점을 재현할 뿐이라는 사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유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