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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무언가를 기록한다는 건

그동안의 흔적들을 되돌아보며

by 김해뜻


초등학교 1학년 때 내가 가장 싫어했던 숙제는 '일기 쓰기'였다. 생각해 보라.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기, 학교 가서 수업 듣기, 점심 먹고 또 수업 듣기, 집에 오면 TV 보며 뒹굴거리다 저녁 먹기, 밤에는 잠 자기. 매일이 다 똑같은데 뭐 쓸만한 내용이 있겠는가? 그래도 학기 초에는 노력이란 걸 했다. 글씨를 엄청 크게 쓰거나, 띄어쓰기를 엄청 큰 간격으로 쓰거나. 정말 쓸 내용이 없을 땐 당시 유행하는 노래 가사로만 절반을 채운 적도 있었다. 나름 음표까지 쓰는 정성을 보였는데도 성의가 없다며 선생님께 혼났던 기억이 난다. 학기 말에는 그냥 쓰는 걸 포기하고, 손바닥 맞는 걸 선택했다.(당시 그 정도 체벌은 흔했다) 학창 시절 중 선생님 말을 안 들어서 혼났던 건 그때가 유일하다.


나는 친구들보다 받아쓰기 점수가 높다는 점에선 항상 우쭐한 아이였는데 선생님이 불러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서 써야 하는 글은 창피해했다. 일기도 어쩌면 그런 이유로 쓰기 싫어했을 수도 있다. 글쓰기를

유난히 싫어했던 건, 지금 생각했을 때 당시 책을 많이 읽었던 것의 반작용이 아니었나 싶다. 책에 적힌 내용처럼 재밌게 잘 쓰고 싶은 마음은 큰데 솜씨는 따라가지 못하니까 그게 싫었던 거다. 글쓰기에 대한 불편함, 그리고 동경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그 오묘한 감정이 변하게 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다. 당시 학교에 작은 글쓰기 대회가 열렸는데 반에 지원자가 없어 그나마 말 잘 듣는 학생이었던 내가 강제로 차출됐다. 억지로 써내 겨우 제출했는데, 얼마 안 가 선생님이 다시 나를 호출했다. 이거 네가 직접 쓴 거 맞냐고. 맞다고 하니, 다시 나를 돌려보냈다. 그 글은 금상을 받았고 나는 국어선생님들의 주목을 받는 '글 좀 쓰는 애'가 되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은 정확하다. 글쓰기에 대한 불편함? 그런 게 언제 있었냐는 듯 자신감이 한껏 붙은 나는 글쓰기 대회라면 어디든 참가하고, 조별 발표를 할 때는 '발표문은 내가 쓸게'라고 당당히 말하는 청소년이 됐다.


또다시 전환기를 맞은 건 대학생 시절. 신문방송학과 국어국문학을 복수전공하게 된 나에게 글쓰기는 필연적으로 '배움의 영역'이 되었다. 하지만 과정은 쓰디 썼다. 지금까지 그렇게 잘 쓴다고 칭찬만 받던 내가 이런 점수를 받는다고? 이렇게나 수정해야 하는 내용이 많다고? 내가 쓰는 방법이 틀렸다고? 배우면 배울수록 미궁에 빠지는 글쓰기의 세계는 다시 애증의 길로 나를 떠밀었다. '제대로 못하면 하지 않는다'가 인생의 신조였던 나는 또 글쓰기를 멀리 했고, 그냥저냥 애매모호한 글을 과제 마감 직전에 '갈겨쓰는' 사람이 됐다.


그래서 내게 글쓰기는, 소위 말하는 회전문 같은 존재였다. 불편했다가, 동경했다가. 자신감의 원천이었다가, 그 상실의 주체였다가. 좋았다가, 싫었다가. 가까웠다가, 멀었다가. 하지만 결론만 놓고 보자면, 대학 시절 받은 충격적인 점수와 빨간 줄이 난무하는 리포트가 글쓰기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을 만큼의 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졸업 후에 또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걸 보면 말이다. 나는 글을 쓰는 일을 결국 업으로 택하지는 않았지만, 취미로나마 생각과 일상을 기록하는 일은 끊길 듯 끊기지 않는 지하철 와이파이처럼 간간히 이어왔다. 브런치도 그중 하나였고.


글을 쓸 때 내가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내 글은 나를 따라가는구나'이다. 기분이 좋을 땐 둥실둥실 밝은 글이, 조금 우울할 때는 무겁고 진지한 글이, 센티해지는 날에는 평소보다 더 감성적이고 잔잔한 글이 써졌다. 회사 생활이 바쁘단 핑계로 잠시 글을 쓰지 않고 있었을 때는 종종 오래전에 쓴 글을 찾아 읽으며 과거의 나를 되새겨보기도 했다. 이때는 마음이 되게 편하고 즐거웠구나. 이때는 좀 불안했었구나. 그래도 이런 생각들로 잘 살아내고 있었구나. 지금보다 이때 더 단단하고 씩씩했고... 이런 내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들.


노트북 어딘가에 있던 대학 시절 리포트도, 내게쓴메일함에 저장되어 있던 중학교 때의 글들도 하나하나 읽어봤다. 무작정 스무 살과 열다섯의 기억을 떠올리라고 하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데 이상하게 그 글을 적은 순간들은 기억이 났다. 가지각색의 글 속에는 가지각색의 내가 있었다.


글쓰기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셀 수 없이 많겠다. 창의적이거나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고, 표현력을 늘리는 기반이 될 수도 있고, 누군가와 소통할 때 유용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글쓰기의 가장 큰 장점은,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다. 그 안의 존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지금까지의 글들이 내게 남긴 것은 전부 중요한 흔적이었다. 일기 쓰기를 싫어하던 8살 꼬마가 이렇게나 긴 글을 쓸 만큼 성장했다는 흔적, 학창 시절에는 글 잘 쓰는 애로 이름 좀 날렸었지 하며 으쓱대게 만드는 흔적, 때로는 부족함을 느껴서 멀리했지만 결국은 또다시 쓸 용기를 냈다는 흔적, 어떤 순간을 경험했고 어떤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걸 어떤 방식으로 간직하고 싶은 사람이었는지를 나타내는 흔적.


앞으로 써 내려갈 '장점 여정'의 시작이 글쓰기여야만 했던 이유도 결국은 여기서 출발한다. 나는 무언가, 혹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이고 그건 결국 나와 그 존재의 소중한 흔적이 될 것이다. 가지각색의 이야기 속에서, 가지각색의 빛나는 면들을 발견하고, 가지각색의 흔적들을 남겨야지.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글쓰기'이기 때문에, 나는 이다음의 글을 위해 흰색의 공간을 비워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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