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한 온달
나는 처음부터 바보는 아니었다.
비상했던 시절도 있었다. 바로 예산군 노인요양원에서 보낸 1년이었다.
평강이 건네준 꿈노트를 채우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내게, 그녀는 또 하나의 길을 열어주었다.
“오빠, 사회복지사를 준비해 보는 게 어때요? 오빠가 할머니에게 하던 대로만 해도 훌륭한 사회복지사가 될 거예요.”
평강의 작은 넛지(nudge)는 내 삶의 또 한 굽이를 만들어 주었다. 당시 그녀는 요양원에서 물리치료사로 근무 중이었고, 사회복지사의 모습이 내게도 어울려 보였던 것 같다.
낮에는 건설회사 직원으로 일하며, 밤에는 학점은행제를 통해 사회복지사 2급 과정을 밟았다. 술자리가 잦아 고단한 날에도 강의 창만 띄워놓고 책상에 엎드려 버티던 기억. 시험 날이면 평강과 함께 바닥에 교재와 노트북을 펼쳐놓고 문제를 풀었고, 과제는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렇게 주경야독의 1년을 보내고 사회복지사 자격을 취득했을 때, 우리는 물리치료사와 사회복지사, ‘사짜 부부’가 되었다.
그즈음 평강이 다시 옆구리를 찔렀다.
“우리 요양원에서 사회복지사를 뽑는다는데, 한번 응시해 봐요.”
운명이 내게 손짓하는 듯했다. 그러나 망설임도 있었다. 건설회사에서 14년간 총무, 인사, 노무, 계약업무를 거치며 관리직으로 성장해 부장 직급에 오른 시점이었다. 익숙한 길과 새로운 길 사이에서 고민이 깊어졌다.
그때 평강이 덧붙였다.
“출산휴가로 자리를 비운 사회복지사 대신, 1년 단기 계약직을 뽑는대요.”
결심이 섰다. ‘1년쯤은 괜찮겠지.’ 언제든 돌아갈 자리가 있다고 믿었다.
면접을 보게 되었다. 원장님은 내 고향 선배였다. 학연, 혈연, 지연 중에 지연 하나는 걸쳐져 있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예상과 달랐다.
“후배님이 오면 잘할 것 같긴 한디, 채용이 어렵것어. 올해 요양원 평가가 있거든. 그 결과에 우리 요양원의 운명이 달렸어.”
나는 이미 그 사정을 간파하고 있었다. 정부가 고지한 평가 매뉴얼과 문항들을 미리 검토해둔 터였다.
“원장님, 올해가 첫 평가인데 어디에 평가 전문가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1년 계약직을 뽑는데 어느 우수 인재가 오겠습니까. 저는 1년 계약직이 필요했고, 이 업무는 제가 전문입니다.”
건설회사에서 나의 업무는 국가계약법과 지방계약법에 따라 회사가 규정을 충족하도록 조건을 갖추는 일이었다. 그 경험은 요양원 평가 준비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평가매뉴얼은 일종의 정답지였고, 나는 그 정답에 맞는 과정과 결과를 설계하면 됐다.
“듣고 보니 그러네. 그럼 언제부터 출근할 수 있겄어?”
협상의 무게는 내게로 기울었다. 나는 조건을 내걸었다.
“제 업무는 두 가지만 맡겠습니다. 하나, 평가 준비. 둘, 어르신들과 노는 일. 이 외의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최우수 등급을 받지 못하면 제 책임으로 하겠습니다.”
급했던 쪽은 요양원이었다. 전임 사회복지사의 출산일은 눈앞에 다가와 있었기 때문이다. 협상은 순조로웠다.
입사 한 달 뒤, 구내식당 앞에는 직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식당 안에는 책상마다 부서별 서류와 색색의 견출지가 붙여져 있었다. 직원들은 자신에게 배정된 서류를 찾아 서명과 도장을 찍었다. 이후 집체 교육을 통해 일일·주간·월간 업무를 정리하고, 서류 작성 요령과 비치 장소까지 일일이 지도했다.
건설회사에서 갈고닦은 관리 역량을 총동원한 진두지휘였다. 성실한 직원들이 호응하면서 시스템은 완벽히 갖추어졌다. 그 결과, 전국 3,300여 개 요양시설 중 상위 10% 안에 드는 최우수 등급을 획득했고, 2천만 원의 인센티브까지 받았다. 예산군 노인요양원은 명실상부한 ‘텐프로 요양원’이 되었다.
그 후 남은 기간 동안 나는 어르신들과 노는게 일이었다.
“강 과장 팔자가 상팔자여. 놀고 먹으면서 급여 다 챙겨가니 말이여.”
원장님의 농담이 칭찬처럼 들리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추억.
그해 예산군에서 열린 전국노래자랑에 요양원 대표로 출전해 인기상을 받았다. 어르신들과 직원들이 함께 응원해 준 무대였다. 평가 준비로 쌓였던 긴장이 모두 웃음으로 풀린 순간이기도 했다.
그렇게 꿀 같은 1년이 흘렀다.
계약 만료 무렵, 전임 사회복지사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저는 복직할 생각이 없으니, 선생님이 계속 해주시면 좋겠어요.”
그 말에 내 마음도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처음에는 쉼표처럼 택했던 일이었지만, 이제는 더 하고 싶은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뒤, 전임자의 마음은 뒤집혔다. 복직 의사를 밝힌 것이다. 직원들과 어르신들이 나를 붙잡았지만, 원장님은 담담히 말했다.
“강 과장 덕분에 우리 요양원이 틀이 제대로 잡혔네. 그동안 고마웠어.”
이어가고 싶던 길이었지만, 타의에 의해 멈춰야 했다.
채용을 원하는 건설회사의 러브콜도 있었지만, 선뜻 답하지 못했다. 난생처음 해보고 싶던 일을 맘껏 해본 1년, 그 경험은 내 안에 불씨를 남겼다.
‘이렇게도 살아보고 싶다.’
삶에는 늘 굽이가 있었다. 열리지 않는 문도 있었고, 누군가 막아선 길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일으켜 세워준 사람이 있었고, 다른 문이 열렸다. 그 모든 순간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덕분에, 오늘도 나는 놀며 산다.
https://youtu.be/EDELuE8tuH8?si=6Y6OrgYq73zQY6zd
전국노래자랑 출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