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선 연습이 필요하다.'
우리는 척박한 시대에 살고 있다. 나와 다른 이념은 듣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은 배척. 나와 다름을 인정하기보다는 너가 틀렸고, 나만 맞음을 알려주기 위한 외침. 자기 자신도 완벽하지 않으면서 남의 부도덕을 손가락질하며 우월감을 느끼는 편협. 그 외에도 익명성에 숨어 사람을 저주하고 괴롭히는 댓글까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미 많은 이들이 이야기했듯, 혐오의 시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미국도 일본도 독일도 뉴질랜드도 터키도 북유럽도 남아메리카도, 아무튼 요즘 비슷한 현상으로 전 세계가 갈가리 쪼개지고 있는 중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쪼개졌던 냉전시대보다 오히려 지금이 더 힘든 시기가 아닐까 싶다.
조정래 작가의 '인간 연습'은 지금 같은 시대에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인간이 목숨을 걸고 추구해 온 이념이 얼마나 덧없고 보잘것없는 것인지를 보여주며, 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 것은 이념이나 사상이 아닌 ‘인간 본연의 가치’, 다시 말해 서로 어울려 함께 살아가는 삶임을 일깨워준다. 또한, 인간 근원의 행복은 결국 이런 인간적인 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
책은 '박동건'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박동건의 오랜 벗이자 동지였던 '윤혁'이 그를 회상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박동건과 윤혁은 '공산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쳐 살아온 일명 '빨갱이'이다. 그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선망했던 이유는 그것이 인간을 위한 순수한 이념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공산주의야 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사상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박동건이 죽기 바로 전, 윤혁에게 했던 말이 그것을 잘 나타낸다. 그들이 그 이야기를 나눌 때 소련은 이미 망했고, 북한에는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공산주의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23
윤혁은 손바닥을 쫙 펴서 그의 검지 끝에 대주었다. 박동건의 검지는 곧게 펴지지 않았다. 힘없이 구부러진 그의 손가락은 아직 미성숙한 젖먹이들의 손가락처럼 둔하고 어설퍼 보였다. ... 박동건의 손가락이 떨리며 가까스로 그려낸 글씨는 '나'였다. 두 번째 글씨는 획이 많았다. 윤혁은 더 눈을 부릅떴다. "전 맞소?" 박동건의 입 언저리는 다시 웃음을 지어냈다. 그런데 글씨 그려내는 일마저 힘이 드는지 숨 쉬는 게 거북해 보였다.
세 번째 글씨도 간단하지 않았다. 획 하나하나를 따라가다가 '햐'를 읽어낸 순간 윤혁은 머리를 치는 충격에 부딪혔다. 그리고 세 글자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전향서!
박동건이 놀라는 기색을 드러냈다.
"전향서, 그거 박 동지는 안 쓴 거라는 말을 하려는 거지요?"
"으...., 으....., "
이런 소리와 함께 박동건의 눈에서는 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박동건이 죽음을 앞둔 마지막 순간에, 소련이 망하고, 북한 정권이 무너지고 있는 그 순간에, 자신이 전향서를 제출한 것은 자신의 의자가 아닌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는 말을 한다. 이것은 어리석음일까, 아니면 위대함일까. 이념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을 이렇게까지 덧없게 만드는 것일까.
박동건의 가족들은 그의 빨갱이란 주홍글씨 탓에 너무나도 힘든 삶을 살았다. 아내는 혼자서 세 자식을 키웠고, 첫째 아들은 공부를 잘해 상업고등학교까지 갔지만 연좌제에 막혀 막노동꾼으로 살았다. 그의 딸은 시집을 갔다가 간첩의 딸이라는 게 밝혀져 이혼을 당한 후 자살을 했다. 그가 신념을 향해 뛰어든 결과가 그야말로 처참 그 자체였던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그의 가족도, 그의 일상도 모두 무너지게 한 것이다. 심지어 그가 그리 원했던 공산주의는 결국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도, 또 후회하지도 않는다.
그가 꿈꿨던 모든 것이 결국 허상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그는 '환상에서 깨어남(인정)'이 아닌 '무너짐(죽음)'을 선택했다.
P36
아버지는 선배한테 북의 참상을 자세하게 다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아버지는 갑자기 변하고 말았습니다. 아닙니다, 소련이 무너지고 나서 약간 기가 꺾이고 기운이 빠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 선배를 만나고 나서는 완전히 탈진한 것 같았고 정신까지 멍해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얼마 못 가 쓰러지신 겁니다.
... 저는 아버지가 사실을 사실대로 알아 사로잡혀 있는 환상에서 깨어나기를 바랐습니다. 근데 아버지는 실상을 알고 환상에서 깨어나자 쓰러져 결국 어머니하고는 앙숙인 채로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
윤혁은 붕괴된 소련과 굶어 죽는 북한 사회, 박동건의 죽음, 그리고 친구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바라보며 끝없는 절망 속으로 빠져든다. 피붙이 하나 없는 그는 차라리 죽기를 원한다.
P61
세상이란,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사람도, 아무리 높은 명성을 드날리던 사람도 숨 끊어져 죽어버리면 그 존재를 냉혹하리만큼 지워버리는 파도 거센 바다였다. 생전에 큰 위력을 발휘했던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어도 세상은 아무런 이상도 탈도 없이 태연하고 무표정하게 잘 돌아가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전향한 장기수 하나쯤이야.... 그 허무감 앞에서 또 반사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하는 회환이었다. 그게 '사상적 삶'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설정했었던 자가 겪을 수밖에 없는 비애였다.
윤혁이 끝없는 절망 속으로 빠져들 때, 부모 없이 둘이 살아가는 남매, 경희와 기준이 그의 집을 방문한다.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다 주인에게 들켜 혼나고 있던 그들을 안타깝게 여긴 윤혁이, 그 뒤로 아이들에게 가끔씩 밥을 사주며 정을 나누곤 했다. 그가 절망의 파도에 휩쓸려 인생을 놓고 싶었던 그 순간, 경희와 기준이 찾아온 것이다.
P61
"할아버지이."
"할아버지 안 계세요?"
맑고 또랑한 두 목소리가 울렸다. 친근한 그 음성들을 듣자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던 칙칙한 안개가 일순간에 걷히는 것을 윤혁은 느꼈다.
"응, 경희, 기준이구나. 나 여기 있다"
햇볕이 반짝 드는 느낌으로 윤혁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P64
이 아이들을 대할 때면 언제나 그러는 것처럼 윤혁의 가슴속에는 새싹 파릇파릇 돋는 너른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경희와 기준이는 푸른 초원만이 아니었다.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이었고,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게 만발한 꽃밭이기도 했다. 가슴에 그토록 생명감 넘치는 황홀한 느낌을 갖게 된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런 감각이 샘솟는 것은 오로지 경희와 기준이 남매가 준 선물이었다. 찌들고 메말라버린 가슴에서 그런 감정이 새롭게 살아 오른다는 것은 스스로도 놀랄 일이었다.
경희와 기준의 등장으로 어둡기만 했던 내레이션이 조금씩 밝아지며 희망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 아이들 덕에 윤혁의 살고자 하는 의지가 나오고, 영원할 것 같았던 그의 생각 또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다.
P122
"예, 아시겠지만, 진보 쪽이 그렇듯 보수도 보수라고 해서 다 똑같은 보수가 아닙니다. 감정적이고 배타적이고 비양심적인 수구가 있는가 하면, 이성적이고 건설적이고 양심적인 보수 세력도 엄연히 있습니다. 그 후자의 보수 세력을 인정하고,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건전하게 균형을 이루어야만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 세상이 달라졌으니 그런 인식을 가져야 하겠지. 허나, 그게 쉽겠는가?"
"예, 우리가 선망하는 선진 국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런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왔습니다. 물론 우리는 분단 상태에 있으니까 어려움이 좀 더 많겠지만, 그럴수록 꼭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진보를 이끌어온 어느 학자가 최근에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글을 썼습니다."
"음, 제목이 좋구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조금씩 삶의 행복을 느끼기 시작한 윤혁은 자신의 삶을 수기로 남기기로 결심한다. 영원할 것 같았던 냉전 시대가 끝나고, 이제는 그 시절을 역사의 한 장면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 사회가 변화한 것이다.
P124
선생님이야말로 우리의 분단 시대를 온몸으로 떠안고 가장 정직하게 살아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아무 일도 한 게 없다고 하시는데, 평생을 수난당하고 산 것보다 더 치열한 일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또 중요한 사실은, 수많은 장기수들이 당한 고난은 엄연한 분단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라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묻혀버리게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까. 그건 꼭 기록으로 남겨져야 할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결국 이 책은, 세상에는 완벽하고 무결점인 사상은 존재하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과 역사가 늘 변화하듯 이념과 사상 또한 끊임없이 변하기에, 근원적으로 영원한 이념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다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끼리 나누는 '정'과 '사랑'인 것이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이념'이 아닌 ‘사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 영원불멸한 힘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