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박증 극복하기 #1
병원에서 진단을 받아본 적은 없지만, 나는 (아마도) 강박장애 환자다.
'환자'라고 하니까 무겁게 느껴지는데, 사실 내가 강박증을 앓아온 세월은 무척 길며 한때는 증상이 심각하여 학업이 곤란했던 적도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교과서의 내용을 읽지 못해 무력하게 울기만 하던 날도 있었다. 이미 읽고 넘어가면 되는 부분인데, 읽었음에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한 페이지를 3시간씩 붙들고 읽었던 부분을 읽고 또 읽고.... 하는 이상한 행동을 했다. 그 당시 내 교과서를 보면 연필 자국이 새카맣다. 눈으로만 읽으면 읽었다고 생각이 되지 않아 소리를 내어 읽고, 그마저도 머리에 안 들어오는 것 같아 연필로 밑줄을 넘어 교과서 글씨 외곽을 표시하면서 글을 읽었다. 그 교과서는 아직도 버리지 않고 두었는데, 증상이 제일 심각하던 날 공부했던 페이지를 열어 보면 무슨 아라비아 문자처럼 지렁이같은 연필 표시가 가득하다.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 당시에는 정확히 내가 왜 이러는지 몰랐다.
증상의 일시적 해결은 '포기'에 있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입시는 커녕, 제명에 못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신병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시험에 대한 극도의 스트레스, 1등을 해야한다는 환경적인 압박 뭐 이런 것들이 완벽에 대한 집착을 불러왔고, 글 한줄이라도 완벽하게 읽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이 '읽어도 제대로 읽은 것 같지 않다', '제대로 읽을 때까지 다시 읽는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특정한 강박 행동(교과서 활자에 연필로 읽은 표시를 하는 것)을 반복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살 순 없었고, 낮에 강박행위를 하며 허비한 시간을 메우려고 밤새 공부를 하는 패턴이 지속되다보니 몸도 마음도 망가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 난 1등을 할 수 없는 사람이구나', '그냥 이정도가 내 한계이구나' 하고 공부를 어느 정도 포기(?)했더니 그 이후부터 책을 못 읽는 문제는 없어졌다.
그리고 대학에 가니 많은 문제가 해소됐다. 사실 그런 정신적 문제 외에도, 나는 일주일에 두세번 배가 아픈...과민성 대장증후군의 문제도 있었다. 사람이 뭐 이리 나약하게 태어나고 자랐는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아도 배가 아파 조퇴하고 집에 오는 일, 학교 보건실에 누워있는 일이 잦았다. 늘 담요를 두르고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다녀 아이들 사이에서도 내 복통은 정평이...ㅎㅎ 여튼 과민성 대장증후군도 대학 입학 후에 거의 사라졌다.
내 증상이 '강박증'이라는 건 대학교 때 알게 되었다. 당시에 문학치료라는 수업을 들었고, 담당 교수님이 가볍게 심리치료 테스트같은 걸 해주셨는데, 그 때 강박성향이 너무 높게 나와 놀라시더라. 1부터 10까지로 증상의 심각도를 평가하는데, 강박 성향이 7? 정도로 나왔었다. 그리고 그 때 해주신 말씀이 기억나는 게, 이러한 강박 성향을 잘 다스릴 줄 알면, 성공지향적인 방향으로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하셨다. 하지만 완벽과 성취에 대한 추구에 만족이란 있기 어려우므로 심각해지면 스스로 너무 인생이 힘들어질 거란 것. 당시 교수님이 나에게 "그래서 이런 강박성향을 해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 같니?" 라고 물으셨는데, 아무 생각 없이 "제가 어느 정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취를 얻으면 더이상 안 그러지 않을까요?"라고 대답을 했는데.. 교수님도 '헉;' 하시고 나 스스로도 말을 뱉자마자 '응?'했던 기억이 있다. 내 대답이야말로 강박증 환자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이었기 때문. (만족이란 상대적인 것이므로... 목표를 '성취'로 잡으면 나는 끊임없이 성취를 위해 강박적인 행동을 반복하게 될 것)
여튼, 그래서 그때부터 마음이 힘들어질 때마다 내가 강박증이어서 이렇구나, 이건 병이구나, 다스려야 겠구나 하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하고 살았다.
실제로 지금은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학업적인 문제 외에도 외출 시 모든 물건을 잘 챙겼는지 머리부터 발 끝까지 숫자를 세며 세번 정도 반복하고 집을 나서거나, 가스불을 껐는지 걱정되어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적도 있었다.... 머리 어깨 무릎 발 하고 숫자를 세며 무언가를 확인하는 행동은 전형적인 확인 강박 환자의 강박행동이라더라. 일단 그런 의식적인 행위를 하고 나야 안심이 되며, 그런 행위를 하지 않고서는 무언가 놓쳤고, 빠뜨렸고, 잘못 될거란 불안이 해소되지 않았으므로 다소 이상하긴 하지만? 스스로 마음이 편해지기 위해 반복적으로 강박행위를 하던 때가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강박증을 고쳤느냐고?
음...내 생각에 강박장애는 완치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마음이 불안해지거나, 계획대로 일이 이뤄지지 않거나, 남들보다 내가 뒤처져 있거나, 성취를 해야하는 목표가 생기면 다시금 강박적인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때문. 그리고 한번 그런 마음이 생기면 이는 겉잡을 수가 없다. 강박행위는 또다른 강박행위를 낳고... 그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나는 다시 중증의 강박장애 환자가 된다.
이 글을 쓰는 이유도, 최근에 다시 강박장애로 힘들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직을 하기 위해 현 직장에서의 업무를 정리하고, 이직 포트폴리오를 준비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문득 '후회'라는 무서운 감정이 밀려왔다. 현 직장에서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놓은 것이 없고, 연봉도 높이지 못했으며, 이직을 위한 포트폴리오에 쓸 만한 경험도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이제부터라도 지난 과오(?)를 메우기 위해 더 완벽하게 업무든 뭐든 해서 남들과 비슷한 정도로 성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조급해졌다. 그 당시에는 왜인지 모르게 마음이 너무 무겁고 우울했다.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그들보다 나는 조건도 상황도 뒤처져 있는데 주제도 모르고 같이 끼어 노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만나기 싫었다. 내가 즐겨왔던 모든 것이 사치로 느껴졌달까?
그러자 업무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한 번 확인하면 될 것을, 두세번씩 확인하면서 완결성에 집착하게 된것이다. 업무란 게 돌발적인 상황이 없을 수가 없는데, 내가 계획해놓은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절차의 확인에 집착했다. 어느 날, 연말정산을 하다가 웹페이지의 처음부터 끝까지 지나칠 정도로 읽고, 확인하는 나에게 질려 자가 치료라도 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일단 병원에 가기 전에, 관련 도서를 읽으며 자가 치료를 해보려고 했다. 사실 병원에 간다고 해서 상담 외에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싶기도 했고, 정확히 어떤 개념이며 어떤 증상인지 내가 알고 싶기도 했다. 그동안 막연하게 난 강박증이 있어...라고 생각만 했지, 다른 사람은 어떤 증상을 겪고 있는지도 잘 모르고 내가 힘든 이유가 강박증이 맞는지도 확실하지 않았으니까?
여기저기 검색해보면서 내가 찾은 강박장애 관련 도서는 다음과 같다.
1. 강박장애(이용승 외, 학지사)
2. 끊임없는 강박사고와 행동 치유하기(크리스틴 퍼든 외, 소울메이트)
3. 강박증의 통합적 이해(권석만 외, 학지사)
4. 나는 강박장애입니다.
5. 나는 강박과 함께 살아왔습니다.
6. 나는 왜 나를 피곤하게 하는가(권준수)
7. 이상심리학의 기초(권석만, 학지사)
8. 강박증(강박장애)의 이해와 치료
9. 멈출 수 없는 사람들
10. 멈추지 못하는 사람들
솔직히 이 10권을 다 읽으면 강박장애 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다 읽겠다는 건 아니고.. 전문적인 책과 가벼운 에세이까지 쭉 리스트업을 해봤다.
그리고 첫 입문으로 에세이 정도가 좋을 것 같아서 강박장애 관련해서 많이 언급되는 책, 쓰쓰미 료지로의 <나는 강박장애입니다>를 e북으로 사서 읽어보았다. 강박장애로 교사직까지 그만둘 정도로 힘들었던 한 사람의 자가 치유 과정, 강박장애 치유 팁 등이 있는 책이다.
다 읽어본 결과, 여러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다. 나만 그러는 게 아니구나..해서 신기하기도 했고, 그래도 나 정도면 약과이며, 이 장애로 직업까지 그만둘 정도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에 안타까웠다.
나의 경우엔 평소에 평균 이상의 완벽주의와 확인에 대한 집착은 늘 있는 편이지만, 보통 수준 이상의 강박행위는 스트레스를 엄청 받았을 때나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편이다. 책을 읽던 중 내가 걱정하던 환경의 일부가 조정되어, 마음이 좀 편안해지면서 증상이 많이 사라졌다. 그래서 책을 완독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은, '강박행위를 계속 하는 한 강박장애는 낫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지나가면 강박관념은 사라진다', '조금이라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면 괜찮은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약이 될 수 있다' 등의 문장이었다.
강박관념을 없애기 위해 반복적으로 강박행위를 하지만, 이 행위에 의존해서 불안감을 없애다보면 강박관념은 없어지지 않을 거란걸 안다. 차라리, 시간이 지나면 강박관념은 없어진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강박관념을 무시하고 다른 할일을 하거나 '확인하지 않는다 해도 지구가 멸망하는 건 아니잖아'라는 생각을 주문처럼 외는 것, 그리고 일반적, 상식적으로 '지금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긴 하잖아. 그럼 괜찮을거야. 경험적으로 생각해 보자.'는 생각을 하는 것 등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실제로 나는 어떤 불안감이 생기면, 이를 합리화하는 강박행위를 하기 전까지는 끊임없이 이 불안감에 매여있는 편이다. 그래서 당장에 할일이 있어서 이걸 해소하지 못했으면, 이틀이나 사흘이 지났더라도 꼭 시간을 들여 이러한 강박관념을 해소하는 강박행위(회고나 합리화, 재차 확인하는 등의 행위)를 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나는 매일 해결하지 못한 불안감과 찝찝함이 숙제로 남은 채 잠이 든다. 하루에 한두시간 정도는 들여 지난 번 불편했던 마음을 되짚어보고, 그래도 괜찮아 이러이러했으니 어쩔 수 없어 하고 합리화하고 이를 글로써 메모하면서 회고를 해야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에게 강박관념이 그저 지나가기를, 시간이 해결해주기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나는 어떤 감정을 쉽게 잊지 못하며, 내가 내 모든 감정과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다스려야 하는 감정이 쌓이고 쌓이다가, 부채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일을 자꾸 겪으니 정신적으로 지칠 때가 많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처럼 직접적으로 생명에 위협을 주는 정신장애는 아니지만 강박장애는 스스로를 참 힘들게 하는 병이란 생각이 들었다. 늘 스스로를 검열하고, 어떤 원칙을 강요하고, 스스로 정상이 아님을 알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정상 범주 내의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 혼자 시간을 들여 자신을 다스리고.. 늘상 마음이 괴롭다.
이 책은 가벼운 수준의 강박장애 관련 에세이로, 가볍게 읽고 행동 요법을 따라하긴 좋으나 좀 더 전문적인 해결책이나 지식을 얻긴 어려워서 아쉬웠다. 그래도 저자가 나와 비슷한 확인강박을 앓던 사람이라 꽤나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고, 강박증 해소를 위해 스스로 되뇌일 만한 자기암시에 좋은 문장들도 많이 나와있어서 도움이 되었다.
아래는 내가 읽으면서 공감되어 찍어놓거나, 하이라이트를 친 문장들. 시간이 나면 다 옮겨 적어보겠지만 일단은 사진 첨부로... 내가 가진 크레마 카르타는 하이라이트를 치는 게 매우 힘든 기계라서... 온전하게 밑줄을 긋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참고용으로 올려본다.
일단 시간이 없어 뒤죽박죽 첨부~ ^^;
자세히 읽어보면 도움되는 문장이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