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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Feb 21. 2020

클레임에도 예의가 필요한 법이다

무례함의 결과가 씁쓸했던 어느 날

"아니, 이 젊은 사람도 한 소리 하러 온 거구만. 아니 기관사에게 연락해봐요. 내가 그 XX에게 욕을 한 바가지 해야지 그냥은 못 넘어가. 이게 뭐야? 매번."




퇴근길 지하철,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붐비는 퇴근 지하철 풍경이다. 난 경의선 공덕역에서 퇴근 때에 타는 지하철 시간은 항상 일정하다. 꽉 들어찬 지하철 전동차 안을 밀어서 꾸역꾸역 타는 급행열차. 조금이라도 서둘러 귀가하려는 사람들의 욕심이 불러낸 이 만원 지하철에 나도 항상 동참한다.

  오늘따라 유독 더 더운 듯했다. 퇴근할 때 경의선 급행 지하철을 타기 전 나의 루틴 중 하나는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고이 팔에 걸치고, 최대한 걸리적거릴만한 물건들은 주머니에 넣는다. 예전 선 있는 이어폰을 끼고 다닐 때면 꽉 찬 만원 열차에서 흔들리는 전동차에 이리저리 쓸려다니다 이어폰이 타인의 가방이나 옷가지에 걸려 멱살잡이도 아닌 이어폰 잡이(?)를 여러 차례 당하고 난 후에는 이어폰도 무선으로 바꾸었다.


  재킷을 벗지 않고 타는 날이면 온 몸에는 땀이 범벅이 되고, 이리 흘린 땀으로 목적지 역에 내릴 때면 몸이 파김치가 되어있기 일쑤다.  이렇게 재킷을 벗어도 덥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이렇게 재킷을 벗고 타면 한결 낫다.  어쩌다 운이 좋은 날이면 서있던 자리 앞 좌석에 앉아있던 승객이 '홍대역'이나 '디지털 미디어시티역'에 내릴 때고, 이런 날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얌전한 얼굴로 치열하게 좌석에 앉아 목적지까지 남은 거리를 앉아간다. 이런 날은 가끔이지만 이렇게 자리에 앉을 때면 난 아내에게 톡을 보낸다.


 '지옥철에서 몸뚱이 휘둘리며 끌려다니다가 1등석 좌석이 나서 냉큼 앉았어요. 이리 편하네요. 하하'


 대단한 소파도 안락의자도 아닌데 이리도 편하고, 살만한지 난 이 한 줄 톡에 여러 감정을 실어 보내고, 아내는 이런 작은 행복에도 만족해하는 나에게 항상 '조심히 와요'라고 따뜻한 한 마디를 건넨다.  

 오늘 밖이 추워서 그런지 만원의 지하철 안은 더 덥게 느껴졌고, 요즘 코로나 사태로 인해 마스크까지 착용했더니 상승하는 체온으로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고, 어느새 머릿속의 땀은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문산행 6시 시간대 급행열차는 올 겨울 한 번의 예외 없이 푹푹 찌는 찜통열기와 답답한 객차 공기를 고스란히 앉고 목적지까지 달린다.  오늘은 밀려드는 사람과 공덕역 도착이 조금 늦었던 탓에 더 많은 사람에 끼이고, 치였고. 서있는 자리도 통로와 통로의 중간지점이었다. 정말 최악의 조건까지 갖췄으니 정차역에 잠시 섰을 때 들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도 온풍으로 바뀌어 느껴질 정도였다.


 내리는 정차역까지 꼼짝을 못 하면서 든 생각은 오늘은 꼭 역내 사무실에 근무하는 분에게 찾아가 매번 이 시간에 도착하는 급행열차는 너무 더워서 불편하고, 승객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고 클레임을 넣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흘러내리는 땀을 훔치며 조금씩 하차하는 승객들로 끼여있던 몸이 조금은 느슨해져 갔다.  어느덧 내가 내릴 정차역에 경의선 전동차는 도착했고, 내려서도 식지 않은 땀 때문에 재킷을 들고 계단을 힘겹게 올랐다. 개찰구를 나와 좌측에 있는 사무실로 들어가자 마스크를 쓴 두 분의 역무원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다름이 아니라 제가 자주 지금 도착한 경의선 급행을 타는데요. 항상 객차 안이 더워서 너무 힘들어요. 혹시 객차 안이 더울 때 기관실에 에어컨을 틀어달라고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최대한 무례하지 않고, 예의를 차려서 역무원 한 분에게 역사 사무실을 찾은 이유를 설명했고, 클레임을 들었던 분은 미안한 마음을 한 마디 '아~"라는 탄식에 담아 조용히 메모지에 무언가를 쓰면서 다시 내 뒤쪽을 바라봤다.

  그녀가 바라보는 시선이 내가 아님을 느끼고 나도 뒤를 돌아봤다. 느끼지 못하는 사이 어떤 중년의 남자 한 분이 내 뒤에 서 있었고, 역무원이 그에게 시선을 주자마자 그는 젊잖게 생긴 모습과는 다르게 언성을 높이며 불만을 토해냈다.

 "아니, 내가 지금 이 지하철만 몇 년을 타는지 알아요? 어쩌면 이리 더운지. 몇 번을 조치해 달라고 얘기했는데 고쳐지지가 않아. 내가 중간에 내려서 기관사 있는 칸으로 뛰어가서 그 XX를 때릴까도 싶었어요."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더 흥분하더니 그 중년의 입에서는 그간 힘들었던 감정들이 폭발했고, 급기야 역사 사무실의 여성분에게 반말 반, 욕설 같은 심한 말까지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니, 이 젊은 사람도 한 소리 하러 온 거구만. 아니 기관사에게 연락해봐요. 내가 그 XX에게 욕을 한 바가지 해야지 그냥은 못 넘어가. 이게 뭐야? 매번."

 

  막상 나보다 10년 정도 위로 보이는 남자가 나에게 젊은 사람이라고 아래로 보는 말투도 듣기  싫었지만, 더 싫었던 감정은 왠지 남자가 자신과 나를 동일시하는 동질감으로 내 감정도 자신과 같다는 식의 시선과 말투로 동의를 구하는 제스처까지 보여 기분이 상했다. 듣고 있던 역무원 분도 불편했는지 그분의 말을 끊고는 운전 중에는 무전이 어렵고, 사고의 위험도 있다는 말로 그분을 진정시키려고 하였다. 하지만 한 번 흥분한 그 중년 남자는 분이 히지 않았는지 더 고성의 소리를 질러댔고, 난 조용히 서 있다가 자리를 벗어나려고 발걸음을 옮기려고 돌아섰다. 이런 내 모습을 본 역무원이 다가와 쪽지를 건네며 객차 안 냉방 요청에 대한 전화번호와 안내를 해줘서 설명을 듣고 조용히 역사 사무실을 나왔다.

  원하는 연락처와 방법을 손에 쥐었지만 퇴근길 안 그래도 힘든 몸에 중년 남자의 역무원들을 향한 욕설과 불만을 서라운드로 들었더니 머리까지 지끈대며, 마음도 무거워졌다. 내가 마치 누군가를 비난하려고 갔던 자리처럼.

 

 어렸을 때부터 쭈욱 느껴오는 일이지만 꼭 내게, 또는 내가 아는 사람에게 욕하고, 비난하는 자리가 힘든 줄은 알고 있었지만, 나와 상관없던 사람들에게 누군가가 비난하고, 욕설하는 자리도 불편하고, 힘들기는 매 한 가지임을 오늘 느꼈다. 돌려서 이야기하지 않는 직설적 화법도 중요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조금은 돌려서 이야기하고, 유연할 수 있는 마음자세와 말투가 필요함을 오늘 한 번 더 느꼈다. 그러고 보면 역무원들도 불특정 다수의 승객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 직종이고,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 자신의 일에 소명을 갖고 일을 할 텐데 그런 폭언이나 망언을 들을 때면 마음의 상처가 클 듯해서 처음 사무실 문을 열 때의 내 마음조차도 미안해졌다.


  그 중년의 남자는 정말 '객차 안이 덥다'는 클레임을 수 차례 정말 넣기는 한 걸까? 아니면 넣었는데 기관사 분이 오늘따라 기분이 아주 바닥이었나?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나저나 그날 이후 퇴근 시간 경의선 그 객차는 더 이상 덥지 않게 되었고, 그 중년 남자의 무례한(?)  클레임의 결과라고 하기에는 왠지 씁쓸한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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