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해안도시 오후 카페

- 가을비는 낮선 재즈음악에 실려오고

by pugo


여름이 끝났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어제부터 거칠어진 가을비는 폭염의 기억을 말끔히 덮어버렸다. 거실 문을 닫아도 음악을 들을 수 없게 만들던 성가신 매미소리는 바이올린 비브라토처럼 리듬감 있는 풀벌레소리로 바뀌었고, 하늘은 높고 청명하다.


이번 주는 월요일부터 집, 피트니스, 사무실, 집이라는 굴레를 잠시 벗어나게 한다. 보통은 6시 기상, 30분 후 피트니스센터에서 50분 슬로조깅, 8시에 사무실에서 유기농레몬즙을 탄 생수를, 또는 에티오피아 코케허니 드립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벌려놓은 사업이 네 개, 그중 가장 흥미로운 도시, 서해안에 위치한 이곳에 공무원 면담이 시작되었다. 한 시간 동안 차량으로 이동한 후, 시청 지하 1층 회의실에서 지난 1차 면담 결과와 이번 2차 면담의 핵심포인트를 미리 읽어보아야 했다. 취준생이 면접 대기장소에서 면접 예상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는것과 크게 다를바 없다.


보따리 장사같이 면담할 부서를 돌아다니지 않고 회의실에 가만히 앉아서, 홈그라운드에서 원정팀을 맞이하는 축구선수와 같은 스피릿으로 찾아오는 팀장들을 상대하는 일이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주무부서에서 준비를 성실히 해준 덕분에 마치 갑과 같은 안정감있는 태도를 살짝 취할 수 있게 되었다.


면담 주제는 스마트도시이다. 도시는 인간에게 편리함을 제공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몰려든다. 인구가 밀집되다 보면 주택은 고층으로 바뀌고, 교통수단이 거리를 뒤덮고, 탁해진 대기환경은 인간에게 복수를 시작하게 된다. 위생적인 생활환경과 의학기술의 발전으로 고령자는 계속 증가하고 정책 당국은 고령자를 위한 여러 가지 복지정책에 많은 예산을 쏟아붇는다.


오늘 공무원들과의 주제도 독거노인의 활력유지와 응급상황 대처와 같이 도시문제였다. 팀장급 공무원들과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지자체 예산에 대한 안타까움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중앙부처 공모사업에 대한 생각을 나누었다. 연말에 쓰게 될지 모르는 공모사업에 대해 도와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우리가 써주지는 못하더라도 좋은 공모제안서 몇 개를 갖고 있으니 공유해 드리겠다고 답을 하니 팀장의 얼굴 표정이 밝아졌다. 연신 잘 부탁한다면 자리는 뜨셨다.


오전에 인터뷰한 두 팀은 모두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것들과 내재적인 제약조건들, 그리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우리와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대화의 결과를 잘 정리해서 보고서에 담으면 약 8개월 후 예상된 준공을 무탈하게 완수할 수 있겠다 싶었다.


나는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이 차장은 중국어를 전공했다고 한다. 둘 다 문돌이인 샘이다. 기술은 잘 모르지만 인간의 삶과 도시 생태계에 대한 깊은 이해, 도시문제를 찾아가는 부지런한 노력, 고객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자세, 생각을 정리하는 기술, 뭐 이런 것들로 승부를 성공적으로 이어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점심식사를 공무원들과 하고 싶을 때도 있으나 김영란법이 커피 한잔도 주고받지 못하게 해서, 둘이서 맛집을 찾아 나섰다. 어제는 황태구이, 오늘은 막국수다. 식사 후 한 시간을 버텨야 하는 곳은 정해져 있다. 드립커피와 재즈음악, 플레인스콘 모두 특별한 카페에서 읽다 말다를 반복하고 있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제3권을 집어 들었다. (사실 이 글의 첫문장은 하루키 문장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다이내믹하게 변모하고 있는 시민 그리고 도시, AI기술, 인구변화, 도시민의 기쁨과 절망, 이 모든 것들을 낱낱이 알아보면서 솔루션에 대한 깊은 생각을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즐거움을 맛보는데, 회사가 때 되면 꼬박꼬박 월급도 준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갈수록, 프로젝트를 할수록 지혜로워지고 쓸만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 바로 이 점이 더 큰 기쁨이다. 어릴 때 좋아하던 만화 속 주인공 배트맨처럼 진검승부가 하나 둘 쌓여서 내 커리어가 되고 나의 승률은 높아져 가고, 고객의 입꼬리는 한껏 치켜올라갈 것이다.


이건... 되는 게임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노년은 전투가 아니라 대학살이다.